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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하다면 거창하고, 별 거 없다면 별 거 없는 동기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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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이번 주의 훈련 할당량은 끝났다. 평소 같으면 항상 데리고 다니는 안드로이드가 시간 체크를 해 줄 것인데, 안타깝게도 일주일쯤 전부터 불안하게 자잘한 고장이 나다 못해 이틀 전엔 아예 괴상한 소리까지 내는 바람에 방 한구석에서 얌전히 칩거하며 수리를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다. 주문한 부품도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테니 돌아가면 녀석을 고쳐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레온은 홍채 체크로 오늘 훈련의 종료 기록을 남겼다.

 

기록을 남기고 있는 레온의 등 뒤로 어느새 살그머니 다가와 그의 등을 팔꿈치로 친근하게 툭 치는, 풍성하고 화사한 금발을 높게 묶어 올린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등을 친 사람이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아본 레온은 그 사람을 보자마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HUHF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대학 선배 킴벌리 리, 통칭 '킴 선배' 였다. (이젠 대학도 졸업한 지 오래라 굳이 선배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건만, 오랜 습관 때문에 그렇게 부르던 것이 굳혀져 그냥 '킴 선배' 자체가 킴벌리의 애칭으로 굳혀져 버렸다.)

 

 

 

“누군가 했더니 역시나 킴 선배네요.”

“어쭈, 이젠 놀라지도 않네? 평소에는 다가가기만 해도 귀신같이 기습 경보를 알려 주는 얄미운 네 반려 로봇 친구가 없길래 이번에야말로 기습해서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했더니만. 쳇, 재미없어라. 어쩜 그렇게 재미없는 사람이 다 됐니?”

 

 

입을 비죽이는 킴벌리를 향해 레온은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킴 선배 실력이 녹슨 건 아니고요? 그리고 전 원래부터 재미없었는데, 대체 누구랑 착각하신 거예요?”

“어쭈? 이게 건방지게스리.”

“그래서 무슨 용건이에요?”

 

 

레온의 반응을 보아하니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었나 보다. 킴벌리는 시원시원한 어조로 레온을 향해 물었다.

 

 

“너 아르고 프로젝트에 지원했다며?”

“와,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났어요?”

“웬일이래, 매사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만 입에 달고 살던 싱겁기만 하던 녀석이 무슨 바람이 들어서 아르고 프로젝트에 다 지원하고? 짜식, 안 본 새 다 컸네, 다 컸어. 그런데 무슨 바람이 다 불어서 지원했대?”

 

 

악의 없이 친근하게 자신을 놀리듯 짓궂게 말하는 그를 향해 레온은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씩, 사람 좋은 미소를 만면에 지어 보였다.

 

 

“에이, 싱겁다니 절 뭐로 보시는 거람? 이 레온 램버트, 이래 봬도 나름 ‘로봇공학 하면 램버트, 램버트 하면 로봇공학’이라는 수식이 붙을 정도로 저명한 램버트 가문에서 경호 전공이라는 파격적인 행보를 불러일으킨 사람인데요? 이 정도면 충분히 자극적이지 않나?”

“어쭈, 사족이 길다 야. 내 질문은 까먹었니?”

“제가 아르고 프로젝트에 지원한 이유요? ‘기술과 발전은 누군가의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니까’죠. 제 기술로 이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원했어요.”

“헐, 매사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너답잖게 거창한 이유네.”

“칭찬이죠? 고마워요. 이렇게 말하면 면접에서 그래도 속이 좀 찬 사람으로 보이려나~?”

“뭐야, 너 면접 봐? 내가 알기로는 기존 기관원과 지원자 선발 조건이 다르다고 들었는데. 넌 HUHF 소속이니 면접은 그냥 프리패스 아냐?”

 

킴벌리의 말에 레온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무래도 전 여기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새내기라 여기 경력은 이렇다 싶을 뭐가 없으니, 인사부에서 갑자기 면접 보라고 불러낼지도 몰라요. 이 정도 멘트면 면접관들에게 어필이 좀 되려나~?”

 

 

면접을 보면 보고 말면 말고, 라는 듯한 저 긴장감이라고는 한 톨도 묻어나오지 않는, 태연자약한 태도의 레온을 보며 킴벌리는 혀를 쯧, 찼다. 레너드 램버트, 저 녀석이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매사 별 생각 없이 산다는 점은 학창 시절에 지겹도록 봐서 알고 있었지만, 나이 먹어서도 생각이 없는 건 여전하구나 싶었다. 어떻게 보면 이 큰 프로젝트에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이유 하나로 쟁쟁하고 야망 넘치는 경쟁자들이 가득한 프로젝트에 이력서를 던져 놓고서도 쟁쟁한 경쟁자 후보들도 신경 쓰지 않고, 불시에 잡힐지도 모르는 면접에 대해서 대비도 안 할 정도로 태연한 점은 큰 장점이겠지만.

 

 

“너 로봇공학 학위 안 땄어? 대학 다닐 때 로봇공학 학위도 딸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하더니만. 학교 다닐 때도 그쪽에 꽤 관심 있었잖아.”

“아, 학위요? 그거 결국 안 땄어요. 복수전공까지 하면 제 가련한 뇌가 용량 초과로 과부하가 걸리겠더라고요. 하하.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달까요?”

“너 정말 생각 없이 살았구나. 따놨더라면 이력서에 플러스 점수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에이, 그래도 제 지원 동기만이라도 솔직히 충분하지 않나요?”

“그거 거창하고 좋은 취지인데, 인사부나 면접관들에게 어떻게 보일진 모르겠다. 네가 어떻게 어필하느냐에 따라서 달린 거겠지만 쟁쟁한 사람들이 가득한 이곳에선 그거 정말 별거 없는, 매력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지원 동기로도 보일 수 있거든?”

 

 

킴벌리의 말처럼 레온의 동기는 거창하다면 거창하고, 별거 없다면 별거 없는 지원 동기다. 그는 아직 HUHF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옛말로 비유하자면 사원증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새내기지만 그래도 경험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에도 짬이 나면 실무 쪽으로 뛰어들 일이 없나 갸웃거리기 일쑤였으며, 졸업하기도 전에는 이미 업계에서 나름 소문이 나 있었으며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HUHF 입사 전에는 여러 곳에서 일하며 경호계에서 경력을 탄탄히 쌓아 오던 중 우연한 기회로 HUHF에 지원해 합격한 것이 최근이었으니까.

 

로봇공학과 AI 쪽으로 걸출한 인물들을 몇 배출해내기도 해 세간에 알려진 램버트 가(家) 사람들이 로봇공학이나 AI 쪽으로 능력을 발휘하며 누군가의 삶을 더 편안하고 윤택하게 만들고 있는 데 일조하고 있다면, 세간에 알려진 그 램버트 가의 전통성을 깬 것이나 다름없는 이단아나 다름없는 레온 램버트는 HUHF, 이어서 아르고 프로젝트에서 자신의 능력을 좀 더 폭넓은 쪽으로 발휘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이 항상 입이 닳도록 말하는 ‘기술과 발전은 누군가의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라는 가훈이자 신념을 이 프로젝트에서 자신만의 형태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세간에 알려진 램버트 가의 사람들, 자신의 가족들과는 다른 형태라고 해도.

 

 

“뭐, 동기는 진부하기 짝이 없어도 마음만큼은 진심인걸요?”

 

 

자기 자신이 열심히 갈고 닦은 무예, 즉 본인의 ‘기술’이 다른 사람들에게 폭넓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그거로도 족하다. 운이 좋다면 정말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의 행성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미지의 탐험길 위에 오른 이들 중 자신의 경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지원 동기는 충분하다고, 레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킴벌리가 말했다.

 

 

“그래, 이 왕언니가 응원해 주마. 근데 너 다시 봤다? 학창 시절 수업도 그렇고, 훈련도 일도 모든 걸 매뉴얼대로 따르는 녀석이라 안정적인 걸 선호한다 생각했는데, 이런 모험에 출사표를 던질 생각을 다 할 줄은. 대단하다 너.”

“예? 대단하긴요. 전 그냥 지원자를 뽑길래 지원했을 뿐인데요.”

“야, 전혀 모르는 미지의 우주 공간으로 떠나는 거라고. 거기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안정적인 걸 선호하는 사람이면 절대 지원 안 할걸? 사람은 보통 익숙하지 않은 것엔 질색한단 말야. 하물며 아무도 탐사하지 못했던 미지의 공간이라면 어떻겠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망설이게 될 걸?”

 

 

가본 적 없는 미지로의 대모험? 아무도 탐사하지 못했던 미지의 우주 공간, 익숙하지 않은 곳, 알 수 없는 곳에 대한 불안함? 그런 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그것보다 일단은―

 

 

“프로젝트 합격도 안 했는데 그런 것까지 생각하기엔 시기상조라고요, 킴 선배.”

“어쭈, 그러다 만에 하나 합격하면 어쩌려고, 너?”

“합격하면 뭐 합격한 거죠. 아, 선배도 드실래요?”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두 개 꺼내 봉지를 찢어 내용물을 입에 넣은 레온은 초콜릿을 입에 문 채 손에 남은 하나를 킴벌리에게 권했고, 레온이 권한 초콜릿을 받아든 킴벌리는 봉지를 찢으며 레온에게 대꾸했다.

 

 

“한마디로 생각이 없단 소리구나.”

“생각할 필요도 없잖아요?”

 

 

하긴, 가까운 미래에 불시에 잡힐지도 모르는 면접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에 대해 긴장감을 느끼기는커녕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레온이 면접보다는 훨씬 더 멀 벌어질지 안 벌어질지 모르는 조금 더 먼 미래의 일에 대해 생각할 리 만무했다. 지금도 보라, 이력서를 넣은 당사자인데도, 긴장감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태도로 태연자약하게 초콜릿을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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