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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4] 거창하다면 거창하고, 별거 없다면 별거 없는 이유일지라도

양자택일은 항상 어려운 문제다. 특히 회사 일과 관련되어 있을 때는 더더욱! 내가 HUHF 입사 전에 근무했던 회사들은 선택지 A랑 B 중에서 아무거나 골라 놓으면 상사들이 ‘본인들의 경험에 따른 판단하에’ 내지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기 때문에 내 선택이 별다른 영향을 준 적이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내 선택이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 나아가 이 선택이 한 지적 생명체들의 존속과 미래에 관련될 문제라면… 아무리 나라도 조금쯤은 생각해 보게 되기 마련이다.

뭐, 그렇다고 해도 이 별을 며칠 동안 꼼꼼히 둘러본 나는 이미 질문을 듣자마자 더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을 정했지만 말이다.


‘섀니런들에게 워프 장치를 넘겨주고, 그들은 그들의 삶,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돌아간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너무 간단히, 그리고 성급하게 정한 것 아닌가? 라고. 하지만 이것은 나름 이번 탐사를 거쳐 얻은 경험에서 나왔단 말씀이다.

이번 탐사로 나는 많은 것을 보고, 겪었다. 이 경험들, 특히 컬드에서 보고 겪은 일들은 내가 아르고 프로젝트를 마치고 돌아간 이후 그 어떤 프로젝트, 혹은 제2차 아르고 프로젝트에 참여하더라도 두 번 다시는 겪지 못할 경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이번 탐사에서 탐험한 행성들은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조건의 행성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우주에 컬드, 옛 지구와 같거나 비슷한 조건을 가진 행성이 있을 수도 있다’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설명해 주기도 했다. 비록 앞으로 그런 행성을 만날 확률이 낮다 못해 제로에 수렴한다고 해도, 우주는 그만큼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으니 또 모험을 감행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이미 한번 해 봤는데 두 번은 못 하겠어? (세 콜로니에서 으뜸가는 인재들이 모인 HUHF인데, 두 번, 세 번도 못 한다면 솔직히 범콜로니적 망신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여기서 독자적인 문명과 기술력을 이루고 살아가는 섀니런들에게서 평온하고도 익숙한 일상을 빼앗고 싶지 않다. 그들이 말한 ‘보이지 않는 미래’가 당장 일어나든, 아니면 수십 수백 년 후에나 일어날 일이든 간에. 어쩌면 우리는 3.7%라는 확률의 도박을 기적적으로 성공해 공존을 이룰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공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갈등을 빚고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같은 지구에 원류를 둔 인간, 심지어 같은 콜로니에서 살아가는 인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데, 서로 다른 별과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이성인(異星人)인 우리는 어떻겠는가. 게다가 반대로, 우리의 콜로니, 기술력, 문화…뭐가 되었든 우리가 쌓아 올린 것과 평온한 일상을 빼앗겠다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 역시도 달갑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도 내게서 누가 앞으로 더는 로봇을 만지지 말고 로봇과 관련된 일에도 눈길 하나 주지 말라고 한다든가, 내 기술력의 원천인 정크를 빼앗겠다든가, 그딴 엿 같은 소리…흠흠, 그런 과격한 소리를 하면 설사 내가 하는 저항이 하나도 의미 없는 저항이라고 해도 끝까지 저항할 것이란 말이다. 요컨대, 내가 렉시 누나를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고! 렉시 누나에게 매번 이기지 못할 걸 알면서도 매번 대드는 거랑 비슷한 이유란 거지. …엥, 그건 그냥 내가 깐죽대는 거라고? 뭐 어때! 어쨌든 이기지 못할 게임에서 의미 없는 저항을 한다는 것은 똑같잖아! …참,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오만했기 때문에 인류가 알고 있던, 인류가 살 수 있는 조건을 가진 ‘단 하나의 별로부터 버림받아’ 우주를 떠돌게 된 우리다. 앞서 수많은 사람이 과거의 오류, 즉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사회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아무튼 폭넓은 부분에서 치밀하게 과거를 분석하고 견고하게 시스템을 쌓아왔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이고 시행착오도 겪었을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별에게 버림받은 지 오래, 그보다 기술력이 훨씬 발달한 지금도 삶 속에서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예컨대 버그를 알고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하면서도, 기술력이 발전하는 동안에도 선례가 명백히 존재하는 버그를 보고 겪으면서도 그 치명적인 버그만큼은 고치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문득 누군가의 질문을 떠올린다. ‘행복은 희생 없이는 얻을 수 없을까? 시대는 불행 없이는 넘을 수 없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이 질문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맛보는 행복과 평화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은 것이며, 지금의 평온한 시대 역시도 선대의 불행이 있었기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대를 살고 있는 모두가 겪는 필연이다. 그러므로 그 누군가의 희생도 불행도 당연하다고… 그 점은 나도 부정할 수 없다. 나, 레너드 램버트 역시도 램버트라는 이름과 그 이름을 가졌던 사람들이 이룩해 낸 수많은 업적과 업적에 수반하는 명예, 그리고 거기에 따라오는 가정환경에서 주는 혜택을 운 좋게, 가장 평화로운 시대에 받은 사람이니까.

나는 어쩌면 오래전부터 ‘기술과 발전은 누군가의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라는 신념을 외치며, 그 신념만은 지금까지 물려주도록 애썼던 나의 선대들이 어떤 굴곡과 풍파를 겪었는지도 알지도 모르면서 가장 평온한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가장 달콤한 것만 맛보고 있는 ‘버르장머리 없는 한량 같은 후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버르장머리 없는 한량 같은 후손, 레온 램버트는 감히 말하겠다. 우리는 선례가 있으면서도, 분명 눈앞에 존재하는 인과율, 혹은 버그들조차도 잡거나 고쳐내지 못한 한심하기 그지없는 인류다. 기술력이 발달한 26세기인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우리 인류 하나, 혹은 그 인류 중에서도 소수의 집단이 집단의 행복, 혹은 개인의 행복만을 위해 과거와 똑같은 과오, 즉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인과율이나 버그대로 행동하고 있다. 그리고 섀니런들이 본 ‘보이지 않는 미래’가 섀니런들 그리고 우리가 짐작한 끔찍한 결말이 맞다는 가정하에 생각해 보자. 우리가 오래도록 잡아내지 못한 그 과오를, 우리의 명분을 앞세워 그대로 이성인이자, 우리보다 앞서 이 행성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들인 섀니런들에게까지 저지르고, 그렇게 인류의 ‘행복’에 방해되는 섀니런들을 정복하거나 멸종시키고 나면 칼날은 어디를 향할까? 다음으로 칼날이 향할 곳은 동족, 인류일 것이다. 나아가 그들이 ‘쳔’이라고 말하는 생명체에게도 칼날을 들이댈지 모르는 일이다. ‘쳔’이 에너지원인 동시에 미래를 볼 수 있는 생명체라면, 인류는 그것을 이용하다 못해 그 ‘쳔’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싶어서 더한 짓도 할지 모르고… 그 끝에는 짠짜라잔 빠바바밤! 또다시 별에게 버림받고 우주로, 콜로니로 도피하는 엔딩이 날지도 모르지. 한 번 한 거 두 번, 세 번은 못 하겠어? 특히 나쁜 습관 같은 건 더더욱 쉽다고. 그렇다면 그동안 애써 쌓아온 것들이 무슨 소용이겠냐 이 말씀.

그리고 램버트의 가훈이자 신념인 ‘기술과 발전은 누군가의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 ‘누군가’에는 이성인인 섀니런의 삶 역시도 포함된다. 컬드에서 그들의 삶을 짧은 시간이나마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알 것이다. 그들 역시도 각자의 삶이 존재하는 ‘누군가’라는 것을.

게다가 그들이 원하는 우리의 기술력이 든 장거리 워프 시스템의 보조 기구를 넘겨줘도 우리는 문제 없이 태양계로 돌아갈 수 있다. 즉, 나는 돌아가면 조쉬와 함께 맥도날드에 갈 수 있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소리지. 그에 더해서 가능하다면 Space Tronica 멤버들이랑 함께 HUHF에서 정기 연주회도 열고 싶고(가능하다면 앨범도 내고 싶다! 데뷔해요 우리! 우주도 음악의 즐거움으로 가득 채웠는데 우주보다 좁은 달 기지나 콜로니는 못 할 거 없지 않겠어요!), 라파 씨랑 ‘슈가하이 만세 협회’의 정기 모임도 해야 하고, 라인하르트 씨랑 초콜릿 품평회도 계속해야 하고(난 아직 달 기지 근처 초콜릿 관련 맛집을 모른다!), 렉시 누나에게 ‘레너드 램버트에 관련한 보고서’…가 아니고, 편지를 쓰려는 이아나를 어떻게든 잘 구슬려야 하기도 하고(기왕이면 편지 내용에 좀 참견하고 싶긴 한데 몰래 보면 또 엉큼하단 소리나 듣겠지…), 맞다, 렉시 누나 하니 생각났는데, 마태 씨에게 혹시 가능하다면 누나들이랑 캐런, 특히 렉시 누나를 잘 구슬려 줄 수 있냐고 부탁해 봐야겠다. 안 그러면 정말 렉시 누나에게 얼티메이트-풀 파워로 명치를 걷어차일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킴벌리 씨랑 우주 골든 햄스터 기념일도 기념하는 동시에 같이 겸사겸사 우주 골든 햄스터에 관해 전파도 해야 하고, 이브에게 말했듯 은퇴 이후 우주 골든 햄스터 의류 공장도 차려야 하고(물론 아직 진지하게 생각은 안 해봤다!), 또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아스터 씨에게 ‘진정한’ 스피카 비기 때려서 고치기도 보여 드려야 하고, 나이젤 씨랑 ‘좋은 거래’를 또 하면서 슬쩍 연구부 로봇도 좀 더 뜯어…흠흠, 살펴볼 기회를 달라 하고 싶기도 하고, 내 입사를 삼백 년이나 기다려 준 로쏘에게 ‘직장 동기 겸 친구로쏘 잘부탁드리오!’라고 말한 지도 얼마 안 됐고, 핀 씨에게 나비의 평생 무상 A/S도 약속했고, 파종절 파이나 이번 탐사를 빌미 삼아서 말을 붙여보고 싶은 사람들도 많고, 앞으로 다른 곳에 탐험을 갈지도 모르니까 정크도 계속 개조해야 하고, 개조에 관련해선 아르고 탐사를 앞뒀을 때처럼 아마벨라 씨에게 또다시 의견을 구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덧붙여 갯과 동물을 본딴 정크의 외장은 어떤지, 이 외장이 대부분의 우주 탐사에 적합한지에 관해서도 경험자의 평가를 들어보고 싶기도 했다). 아직 뜯어보지 못한 기계나 로봇들도 많고, HUHF 달 기지에 있는 기계들도 언젠가는 뜯어봐야… 아, 이건 못 들은 걸로. 알면 짤릴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이 레온 램버트의 삶이 창창한 만큼, 앞으로 할 일이 많다, 바빠질 예정이다 이 말씀! 게다가 앞으로 제2차, 제3차 아르고 프로젝트, 혹은 그와 비스름한 것이 열리면 이번에 그랬듯 그 프로젝트에도 도전장을 당당히 내밀어 보고 싶기도 하고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 나는 굴곡 없는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 말씀이다. 그리고 그것은 섀니런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이 본 ‘보이지 않는 미래’가 사실은 더 좋은 쪽일지도 모른다 해도, 교류에서 맞닥뜨리게 될 갈등은 크든 작든 필연적으로 발생할 문제 사항일 것이므로. 어쨌든 우리가 운 좋게 평화적으로 협상을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니까. 게다가 메데이아의 말대로 ‘공생을 위해 과학 발전 수준과 문화가 전혀 다른 집단이 충돌할 경우, 역사에 누적된 인류의 행동 패턴 기반으로 보았을 때 그 공생 가능성이 그리 크지는 않다’라면, ‘행복은 희생 없이는 얻을 수 없을까? 시대는 불행 없이는 넘을 수 없는 것일까?’ 이 문제마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손으로 멸망을 자처해 단 하나의 별에게 버려진 인류 사회에 존재하는 치명적인 버그조차도 잡지 못한 우리가 두 번째 선택지를 고르는 것은 섣부른 선택이며 과욕이겠지. 어쩌면 인류에게 존재하는 이 치명적인 버그는 인류가 존속하는 동안은 해결하지 못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내버려 두기보단, 뭐라도 하는 게 낫다. 그게 비록 적극적인 움직임이 아니더라도, 헛손질이라고 해도 손가락 까닥하지 않고 문제를 내버려 두고 방관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고말고!

게다가 우린 이 탐사로 가능성을 보지 않았는가. 이 우주에 컬드 말고도 또 다른 행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탐사를 거듭하다 보면 우리는 언젠가 희생 없이도 행복을, 불행 없이도 시대를 넘을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고, 더 많은 데이터를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경험해야만 한다.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그리고 나 역시도 협력할 것이다. ‘기술과 발전은 누군가의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 존재’ 하는 한, 내 경호 기술이든 안드로이드에 대한 열정이든, 내가 가진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주의 끝(존재한다면 말이지)까지도 갈 거니까!

…뭐, 내 선택은 그저 레온 램버트라는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결정이 날지는 모르지만…지금 당장은 컬드를 떠난다는 데서 오는 아쉬움이 컸다. 이 정도면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니었는가 보다. 아님 컬드 시간으로 여드레 동안 이 행성과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정이 들었던가! 으음, 이미 충분히 샀지만, 기념으로 이곳의 물건을 더 사갈 수 있으려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닳아가는 기억을 조금이나마 떠올리고, 붙잡기에 가장 좋은 것 중 하나가 바로 기념품인데. 나는 내 귓불에 단단히 고정된 피어싱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그것은 기념품 중 하나로, 눈부시게 빛나는 광물을 연마해 만든 것이었다. 광물은 각도에 따라, 그리고 빛을 받을 때마다 컬드에서 본 짙은 녹빛의 식물들과 컬드 호수의 빛깔, 그리고 그 호수 안에 사는 물고기들이나 도마뱀들의 비늘 색과도 같은 다양한 색으로 이채롭게 빛났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컬드의 경관 한 조각이 담겨 있는 피어스였다.

그나저나 누가 내 선택에 대해서 묻고, 왜 그런 선택을 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한마디로 일축하면 ‘거창하다면 거창하고, 별거 없다면 별거 없는 이유’인데! 아무튼 누군가 나에게 물어볼 때를 대비해 최대한 멋진 대답을 생각해 놔야겠다. ‘인류는 아직 인류 역사상 존재하는 치명적인 버그를 잡지 못했어요’는 어떨까? 크으, 내가 떠올렸지만 좀 멋있군. 이에 대해 왜요? 라고 물었을 때 자세한 내용은… 에잇,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큐엔에이든 면접이든 이런 시뮬레이션 돌리는 건 나랑 맞지 않는다고! 그냥 질문 들을 때 즉석에서 대답할란다! 어쨌든 ‘거창하다면 거창하고, 별거 없다면 별거 없는’, 레온 램버트다운 이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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