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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워커의 ■■
월터 개인 에필로그

호루스의 눈이 파괴되던 날―

 

월터는 파괴되는 <호루스의 눈>을 보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역사 한가운데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 생각이 월터의 머릿속에 머무는 것은 잠시뿐이었다. 월터 워커는 현재만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과거의 일, 미래의 일 같은 것은 당장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역사란 것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재평가되거나 발굴되는 법이다. 월터 워커가 지금 역사에 남을 대사건에 적게나마 손을 빌렸고, 바로 그 한가운데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 있다 해도 무슨 상관인가? 이것이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대사건이 될지, 아니면 묻혀져 버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설령 이 사건이 역사에 남아 길이 기억된다 하더라도, 어차피 월터 워커의 이름은 역사에 남겨지지 않을 것이다. 운이 좋아 남겨진다 해도 그가 세상에 없는 이상 크게 의미가 있지도 않을 것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얻는 영예 따위는 사절이었다. 유명해지는 건, 그래서 남의 이목을 끄는 것만큼 귀찮은 일도 세상엔 없었으니까.

 

그리고 역전의 용사 같은 건 23세기보다 훨씬 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이야기다. 영웅이란 다수를 위해,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칠 수 있는 숭고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겠지. 하지만 월터 워커는 영웅이라고 하기엔 자격 미달인 사람이었다. 그는 숱한 영웅들처럼 대의를 위해, 혹은 숭고한 목적으로 코어로 향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그저 제각기 다른 이유로 코어로 향하기를 선택한 동료들을 따라간 것 뿐이다. 대놓고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동료들에게 한 사람분의 힘을 더 보태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겠다고 선택한 것이었지, 세상을 바꾸겠다는 둥, 세상의 진실을 보겠다는 둥… 거창한 대의 따위는 없었다.

 

지금 월터 워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코어에 들어가지 않기로 한 특수부 동료들의 곁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것. 돌아가서 그들에게 무사히 잘 돌아왔노라고 알리는 일이었다. 그것이 그가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미래였다.

 

그리고,

월터는 모두와 함께 돌아갔다.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들 곁으로.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세상은 여전히 돌아간다.

세계의 진실, 그리고 어쩌면 이 세상을 뒤바꿔놓을지도 모르는 사건의 현장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월터 윌리엄 워커의 평범한 일상은 계속되었다. 당연하지만, 원래 극적인 변화란 생계나 삶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지 않는 이상 크게 체감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니면 일련의 사건을 겪은 월터가 자그마한 변화 정도는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된 탓에 체감이 크게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든가. 두앗에 있던 동안-아니, 오퍼레이션 마아트에 지원한 이후부터 꽤나 혼란스러운 일상의 연속이었다. 갑작스러운 임무, 분수에 맞지 않는 파티, 익숙하지 않은 사건·사고, 믿지 못할 이야기, 익숙하지 않은 도시, 익숙하지 않은 거리…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 연속되는 사건 속에서도 일상은 분명히 존재했다.

분명 코어에서 벌인 대난리로부터 시작된 변화의 폭풍은 아웃스커트 외곽까지도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하지만 코어에서 멀리 떨어진 아웃스커트까지, 변화의 입김이 닿기까지는 분명 적잖은 시간이 걸릴 터였다.

물론 월터는 <호루스의 눈>의 파괴에 직간접적으로 임한 자신의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옳은 선택이든 그른 선택이든 간에 어쨌든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이다. 그에 따른 결과가 어떻든 받아들이는 수밖에. 본인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에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당장 눈앞의 생계도 빠듯해 아등바등 살아가기에 바빠 다른 건 생각할 겨를이 없는 대부분의 아웃스커트 사람들이라면 그랬다. 아웃스커트 토박이인 월터 워커에게 있어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수긍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오시리스의 해방과 그 영향이 넓어졌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특수부의 잠정적 활동 중지, 실질적인 해체 (공식 해체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이쯤되면 해체는 시간문제였다) 역시도 월터 워커에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예전처럼 24시간 중 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를 아르바이트로 꽉꽉 채우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으니까. 애초에 월터가 오퍼레이션 마아트에 지원한 이유는 이런 평온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물론 처음 오퍼레이션 마아트에 지원할 당시 월터가 어렴풋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월터 워커 인생에서 두 번 다시는 없을 획기적인 대사건을 겪은 끝에서야 겨우겨우 되찾게 되었지만 뭐, 어쨌든 모로 가도 아웃스커트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으니 그만 아닌가. 어쨌든 월터는 자신이 오퍼레이션 마아트에 지원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쨌든 월터는 그에게 친숙한 환경, 사람들, 그리고 일상을 되찾았다. 눈 감고도 훤히 돌아다닐 수 있는 아웃스커트의 거리와 골목들, 좁은 골목에 꾸역꾸역 자리 잡은 노점상들, 언제나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는 <주정뱅이들의 낙원>과 홀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제임시나의 큰 목소리, 온갖 일을 알선해 주는 알선 중개업체들과 <마샬 딜리버리>의 마샬이 굼뜨기 그지없는 톰슨에게 고함을 쳐대는 소리, 그 외 익숙한 장소들과 낯익은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월터 워커가 오퍼레이션 마아트에 지원한 몇 개월 동안 생각지도 못한 기상천외한 일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월터는 그 사실에 안도했다.

 

월터 워커는 이제 특수부 소속의 에스퍼가 아닌, 자신이 바라던 그토록 평온한 일상, 지루하기 짝이 없고 꿈과 희망이라곤 생각할 틈도 없이 다음 달 생계를 위해 숨가쁘게 일을 해야 하는 아웃스커트 주민의 삶으로 돌아갔고, 아직은 코어 붕괴에서부터 시작된 변화의 바람이 닿지 않은 아웃스커트에서 익숙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오퍼레이션 마아트의 ‘실패’, 두앗에서의 경험, 그리고 매사냥꾼 키라나 와히드와의 만남과 그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크든 작든 월터 워커의 인생에 파문, 혹은 균열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균열은 월터 스스로가 무슨 수를 쓰든 메워지지 않을 것이고, 수복하더라도 여전히 자국은 상흔처럼 남아 있을 것이었다. 마치 23세기의 모래 대지에 남겨진, 폐허나 다름없는 옛 문명의 흔적들처럼.

 

그리고 월터는 이 균열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변화 한둘쯤 받아들인다고 해서 기존의 가치관이나 자기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은 사막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쩌면 두앗처럼, 도시 유적에 도시를 꾸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잠들어 있는 도시 유적에 ‘노다지’가 잠들어 있을지도 몰랐고, 지금까지 본 괴수들과는 다른 유형의 괴수들이 존재할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알키마드가 유일하게 인간이 인간답게 문화나 문명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도시라고들 했지만, 글쎄, 알키마드 바깥으로 나가면 또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비록 알키마드와 같은 첨단 기술은 없다고 하더라도, 개중에선 도시 유적에서 구한 ‘노다지’들을 활용하는 사람들이 없을까? 그리고 바로 지금, 월터는 사막 위에 있는 그것들이 조금쯤 궁금해졌다. 그것이 그저 순간의 반짝임과도 같은, 그저 흘러가는 무언가에 불과할지라도.

월터 워커는 평소대로라면 무시하고 지나갔을 그 반짝임을 조금쯤 붙잡아봐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사막을 거침없이 건널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짐도 많이 실을 수 있으면 좋겠지.

 

‘트럭 면허를 따야겠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도, 면허를 따 두는 것은 좋은 선택 같았다. 면허를 딴다면, 할 수 있는 일의 폭이 좀 더 넓어질 터였다. 수입의 수단이 더 늘어나서 나쁠 것 없었다.

 

길을 걷는 월터의 등 뒤를 장난스럽게 툭 치는 손이 느껴졌다. 뻔할 뻔자지.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거 같아서 월터는 구태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저 손의 주인은 분명히…

 

“여, 세기의 영웅!”

“…….”

 

토드 바라캇이다. 월터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갈 길을 벗어났다. 야, 야, 잠깐만! 그렇다고 그냥 가기냐? 서운하게스리. 급하게 따라붙는 발소리와 함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식 들었어.”

“헛소문이겠지.”

“그래그래, 뭐든 간에 들었어.”

“네가 아는 소문 대부분은 헛소리일걸.”

“그래서 진위여부를 직접 그 영웅들 중 하나에게 확인하러 왔다 이 말씀.”

 

월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귀찮아 죽겠네. 토드 녀석을 뿌리치려면 말꼬리를 붙잡을 건수를 주지 않으면서 적당히 흥미를 잃을 만한 팩트를 던져야만 했다. 여전히 발걸음은 멈추지 않은 채로 월터가 말했다.

 

“과장 집어치워. 난 그냥 동료를 도우러 간 거야.”

“그 숭고한 자세야말로 바로 영웅의 기본적인 자세라니까, 월트?”

“숭고는 개뿔.”

“겸손도 하셔라.”

 

월터의 발걸음 속도가 빨라졌고, 그와 멀어질세라 토드가 잰걸음으로 월터를 바짝 따라붙었다. 토드는 보란 듯이 월터에게 불평을 내뱉었다.

 

“야, 나 오늘 꼭두새벽부터 이너서클부터 아웃스커트까지, 이 소문의 진위를 파헤치기 위해서 쉬지도 않고 돌아다녔거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내 편의 좀 봐 달라는 소리지, 친구.”

 

친구라니, 금시초문이다. 월터는 토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토드를 바라보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왜 네 편의를 봐줘야 하지?”

 

토드는 잔뜩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뉴스보이 캡을 고쳐 쓰며 말했다.

 

“그래, 이제야 여길 봐주네.”

“허튼소리를 하니까.”

 

월터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토드가 그에게 물었다.

 

“말하기 싫으면 내 질문에 예, 아니오로만 대답해 줘라.”

“…….”

 

월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토드 바라캇이 무슨 질문을 하든, 예, 아니오로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이긴 할까? 세상 만물은 흑백처럼 분명히 나누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흑이기도 하고 백이기도 하고, 흑인 동시에 흑이 아니기도 하고, 백인 동시에 백이 아니기도 했다. 섞이되 섞이지 않기도 하고, 속하되 속하지 아니했다. 마치 월터 워커의 사회적 입지나, 그의 성별 정체성처럼 말이다. 그러기에 월터는 침묵했다. 그것은 분명한 무시의 뜻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토드는 ‘참견쟁이 토드 바라캇’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저 혼자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토드가 던진 질문들에 월터는 그저 침묵으로만 대답했다. 잔뜩 약이 오른 토드가 일부러 월터를 도발하려는 듯 도발성 질문을 몇 개 던졌다. 하지만 ‘무례하다는 표현도 사용하기엔 아깝기 짝이 없는 진상 손놈’들을 많이 상대해 본 월터에게 토드의 도발은 간지럽지도 않은 수준이었다. 토드가 이런저런 도발을 하거나 말거나 월터가 계속해서 침묵으로 일관하자, 토드는 약이 잔뜩 올라 보이는 듯 했다. 이 정도 약올렸으면 됐겠지, 라고 생각한 월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예, 아니오도 아닌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방해돼.”

“죽치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월트! 교차검증을 위해선 네 증언도 필요하다고!”

“번짓수 잘못 짚었어, 참견쟁이.”

 

마침 눈앞에 오늘의 아르바이트 장소가 보였고, 월터는 빠른 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 후, 문이 닫힐세라 열린 문 틈으로 잽싸게 뒤따라붙으려는 토드를 빠르게 밀치곤 말했다.

 

“잘 가라.”

 

월터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토드의 코앞에서 보란 듯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뒤에서 토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경비원들에게 끌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월터는 입속말로 투덜거렸다. 하여간 저 참견쟁이하고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탈의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음을 잘 아는 건 토드 바라캇 본인일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재주라고 생각하며. 저 녀석의 자유이자 일탈의 빌미였던 특수부가 현시점에서 거의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는 이상, 분명 이너서클에 사는 토드의 가족들이 보란 듯이 저 녀석을 잡아가 ‘일탈은 이제 끝’이라며 녀석을 들들 볶을 것이 분명했다. 그 날이 온다면 토드가 월터를 쓸데없는 화제로 성가시게 구는 횟수는 현저하게 줄 터였다.

 

‘생각만 해도 후련하군.’

 

잔뜩 쌓인 나무 궤짝들을 나르기 위해,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작업용 장갑을 끼며 월터는 제발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변화는 지금 당장 온대도 두 팔 벌려 환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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