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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시절
월터 과거

이것은 찰나와도 같은 짧은, 흔하다면 흔하고 평범하다면 평범한 월터 윌리엄 워커라는 아웃스커트의 주민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금으로부터 28년쯤 전 여름, 아웃스커트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탄생은 그에게 생명을 준 누군가에게는 기꺼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 누군가는 아이를 병원에 둔 채 떠나기를 택했다. 아이의 탄생도, 그를 낳은 이가 버리고 떠나는 것도 그저 알키마드, 그리고 알키마드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마침 병원을 찾았던 윌리엄 워커와 릴리안 워커, 통칭 워커 부부에게는 이 아이의 탄생이 그 누구보다도 특별했다. 그들 부부는 태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죽어버린 아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병원에 갈 곳 없이 버려진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맞이하기로 했다.

 

부부는 그렇게 데려온 딸의 이름을 월터라고 지었다. 아이의 성별이 어떻든, 그들이 그들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그렇게 짓자고, 부부가 사전에 정해둔 이름으로 이는 독서광인 워커 부인이 자주 읽던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름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태어나기도 전에 떠나버린 두 사람의 아이를 기리는 이름이기도 했다. 아이의 미들네임으로는 윌리엄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윌리엄이라는 이름은 윌리엄 워커, 아이의 아버지 이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워커 부부가 오래 전 신세를 진 누군가의 이름이기도 했다. 월터 윌리엄 워커의 이름은 그렇게 붙여졌다. 우연이긴 하지만 Walter Wiliam Walker. 약자로 쓰면 W.W.W. 세 개의 더블유가 있는 꽤나 우스꽝스러운 이름이었다.

 

훗날 월터의 이름, 그 유래를 월터 본인에게서 들었을 때, 술집 <주정뱅이들의 낙원>의 주인, 융 할멈의 손녀 제임시나는 월터의 이름, 정확히 말하면 미들네임이 붙여진 경위가 자신의 이름이 지어진 것과 닮은꼴이라고 생각해 즐거워했다. 제임시나는 융 할멈의 자식이자 지금은 아웃스커트에 '없는' 제임시나의 아버지, 제임스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어한 모양이지, 그 작자는. 그 덕분에 이런 개성적인 이름을 가졌고 말이야."

 

제임시나는 자신의 아버지 일을 남일 말하듯 태연하게 말하고는 했다.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던 그의 아버지가 결국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려 '추방'을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나 그는 그런 일에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어쨌든 아버지의 추방은, 제임시나 본인과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융 할멈은 아웃스커트에서 나름 터줏대감인 사람이었다. <주정뱅이들의 낙원>은 꽤 오래된 술집이었고, 양질의 술을 지나친 속임수 없이 저렴하게 제공하는 곳 중 하나였다. 한 잔, 혹은 한 통의 술을 위안으로 삼으며 하루의 고단함을 푸는 이들이 수두룩빽빽한 아웃스커트에서, 사람들은 저렴한 단골 술집을 하루아침에 잃고 싶지 않았고, 다정하지만 성질머리 고약한 욕쟁이 융 할멈의 심기를 구태여 건드리는 짓으로 볼 장 다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적당한 수준에서 입을 닥쳤다. 덕분에 제임시나는 평온한 유년을 보냈다. 물론 제임시나의 성질머리 역시도 융 할멈의 그것과 비견할 정도였기 때문에, 제임시나에게 시비를 걸었던 사람이 역으로 톡톡히 당했지만.

 

워커 부부는 딱히 월터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편은 아니었다. 워커 부부는 성실하게 모아온 저축이 있었다. 하지만 윌리엄 워커 한 사람의 수입만으로는 세 식구의 삶이나 월터의 교육비를 충당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었으므로, 월터가 자라서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게 되고 손발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그들은 월터를 '믿을 수 있는 이웃'인 융 할멈과 그 손녀인 제임시나에게 '전문 시터들보다는 저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적지도 않고 적절한' 보수를 제안하고 월터를 맡기고는, 다시금 돈벌이 전선에 뛰어들었다. 입이 하나 더 늘었으므로 부지런히 벌어야만 했으므로. 월터는 얌전하고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아이라서 손 가는 일이 거의 없었으나 융 할멈은 항상 투덜거렸다. 투덜거리면서도 월터를 제 손녀와 다름없이 챙겨주고는 했지만, 월터는 이 어르신의 상반된 행동을 알기에는 아직 어렸으므로, 침착한 겉모습과는 달리 혼란스러워하곤 했다. 월터보다 나이가 많은 제임시나는 월터를 제 동생처럼 귀여워했다. 그것도 모자라 할머니가 뭐라 구시렁거리기 시작하면 눈을 홉뜨며 한마디 거들고는 했다.

 

"아, 할망구! 시끄러워! 다 늙은 노친네가 주책이야.“

"저년이 저거 내가 애비 없는 년 데려다 키워 줬더니만, 저거 머리 좀 컸다고 아주 따박따박 기어오르려 들어."

"곧 죽을 때 된 할망구가 앞날 창창한 어린애에게 말 좀 곱게 하면 어디가 덧나나?"

"싸가지 없는 년."

"싸가지 없는 년 밑에서 큰 년이 싸가지 없는 건 당연하지. 할망구 밑에서 크면 있던 싸가지도 없어지겠다. 훠이훠이, 월트에게 한마디 더 할 거면 가. 남의 집 애마저 싸가지 없어지면 어떻게 해? 우리 술집 고정 매출은 그날로 사라져, 알지?"

 

제임시나의 말에는 주어가 없었지만, 그가 말하는 '고정 매출'이 융 할멈에게 주는 보수로도 모자라서 저녁마다 <주정뱅이들의 낙원>에서 식사를 하는 것으로 가게의 매상을 올려주는 월터 가족을 칭하는 것임을 융 할멈이 모를 리 없었다. 이 말에는 반박할 수 없어 입속말로 궁시렁거리는 융 할멈을 잔뜩 째려본 제임시나는, 고개를 돌리곤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바지 주머니에서 월터에게 사탕을 건네주며 퍽 다정하게 말했다. 딸기 맛 사탕이었다.

 

"저래 봬도 할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거든. 그러니까 개미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마. 저 할망구 원래 곱게 말하는 법을 몰라서 그래."

"응."

"그럼 난 일 좀 거들러 갈게. 엣헴, 저 할망구가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이 제임시나 님이 없으면 <주정뱅이들의 낙원>은 안 돌아갈걸."

"나도 도울래."

"아서라, 네가 뭐 할 게 있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제임시나는 웃었다. 그는 이 야무진 꼬맹이가 싫진 않았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도움은 오히려 일처리를 늦게 만들곤 했다. 그것은 제임시나도 잘 알았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일을 돕겠답시고 도왔다가 욕만 바가지로 먹곤 하던 그였으니까.

 

"이 가게의 돈줄은 할머니가 꽉 쥐고 있고, 나는 여기에 한톨도 관여할 수 없단 말이지. 한마디로 네 일에 마땅한 보수를…그러니까, 돈을 줄 수 없단 말이야."

"그래도 도울래."

"좀 더 커서 오든가."

"돈 없으면 딸기 사탕으로 줘."

 

월터의 집요함에 제임시나는 두손 두 발 들었다. 그도 할머니가 욕과 잔소리를 퍼붓는다고 해서 한발 물러서는 꼬맹이가 아니었다. 지금의 월터처럼. 오히려 그렇게 고집을 피우고 뻗댔으므로 지금 어린 나이에도 '나름' 숙달된 솜씨로 술집 일을 돕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졌다, 졌어."

 

제임시나는 월터에게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일, 그러면서도 술집의 운영에 크게 타격이 가지 않을 일을 조금씩 맡기기로 했다. 훗날, 이것은 월터 워커에게 큰 자산 아닌 자산이 되는 것은 물론, 훗날 <주정뱅이의 낙원>의 일손에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의 어린 월터와 제임시나에게는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다.

 

이것은 아직, 월터 워커가 생존, 즉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쏟아야 하는 노력과 에너지의 양과, 그러한 과정에서 반드시 느껴야 할 수밖에 없는 고단함과 치열함에 대해선 몰랐던 시절의 이야기. 아직은 월터 워커의 세계가 가족, 나아가 <주정뱅이들의 낙원>이 전부였던 시절의, 아주 찰나와도 같은 시절의 이야기이다. 월터 워커가 이 안전한 껍데기를 벗어나 '세상'을 알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것은 어찌 보면 애석하다면 애석할 일이었지만, 한켠으로는 아웃스커트의 주민으로써 살아갈 월터에게 있어서는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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