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의 수레바퀴

하람 | 어느 12월 25일의 하루

<span class="sv_member">닌닌</span>
닌닌 @ninjaman
2026-03-29 21:59

권지후가 보기에 제 동생은 크리스마스 하루는 맛있는 것을 먹는 날, 그리고 싸구려 선물을 받는 날이라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모양이었다. 비록 산타 따위는 안 믿는 되바라진 허슬턴 꼬맹이인 권하람은 산타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소원을 비는 대신 당당하게 권지후 본인에게 제가 갖고 싶은 것과 원하는 바를 요청했다는 점에서 낭만이 깎이긴 했지만. 하람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크레파스’와 ‘어디 가지 말고 하람이랑 같이 놀아줄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한 마디 덧붙였는데, 그 내용이 아주 가관이었다.

 

“지후 돈 없잖아. 비싼 거 사주지 마!”

“허?”

 

망할, 경제사정이 빠듯한 건 사실이었지만 얼마나 술 처먹고 꼬맹이 앞에서 한탄을 했으면 학교도 안 들어간 꼬맹이가 저런 말을 쉽게 하지. 지후는 제 술버릇을 잠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지만… 이내 관뒀다. 내 주사 정도면 뭐 얌전한 거지, 하고 자기 위안을 하면서.

대신 지후는 하람의 검은 고수머리를 평소 하듯 거칠게 헝클어놓으며 말했다.

 

“이거, 낭만따윈 좆도 없는 꼬맹이일세?”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어떻게든 꼬맹이를 속여야 된다 혹은 일품 연기를 해야 한다는 부담되는 프로세스 하나가 줄어서 다행이긴 했다. 

 

“뭐, 안 속여도 돼서 편하긴 하네. 속이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 말이지.”

 

지후가 씩 웃었다. 그게 소원이라면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하루치 수익, 그것도 크리스마스 수당이 빠져나가는 건 아깝지만… 요즈음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일했으니 하루쯤 쉬어도 나쁠 건 없었다. 무엇보다도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날이었으니까. 요 근래 눈코뜰 새 없이 바빠서 가족다운 일을 못 했으니, 하루쯤은 가족답게 보내도 나쁠 건 없었다.

 

**

 

지후는 약속을 지켰고, 지후가 하루종일 저랑 놀아 주자 하람은 무척 신나 보였다. 제가 자야 할 시간을 훌쩍 넘겼는데도, 눈을 어찌저찌 뜨고 버티고 있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지후의 곁에 바짝 붙은 하람이 종알거렸다.

 

“근데 언니,”

“왜 또.”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알고 있다면 산타는 희대의 변태 스토커 아니야?”

“변태니 스토커니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테레비에서!”

“허.”

 

지후는 어이가 없어 기가 찬 소리를 냈다. 저만한 꼬맹이가 말하는 거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쓰는 게 분명했다. 하람은 지후의 기가 찬 소리를 다른 의미로 이해한 거 같았다. 정확히는 이렇게 어려운 말, 어른들이나 쓸 말을 쓸 줄 알아서 놀랐다는 쪽으로. 하람이 으스대며 말했다.

 

“아무튼 산타가 왜 변태 스토커냐면…”

 

하람의 주장은 이랬다. 전 세계, 그것도 아이들만 있는 집만 골라 CCTV를 달거나 초소형 카메라나 드론으로 일거수일투족을 일 년 동안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리 선물을 줘도 좋은 사람이 아니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전에 애초에 대가를 바라지 않고 좋은 걸 주는 사람은 수상한 사람이었다. 아이를 꾀어내는 유괴범, 인신매매범일 가능성이 컸다!

저 발언을 듣고 있자니… 한숨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낭만 없다 못해…야, 이건 뭐라고 해야 하냐?”

 

지후는 벙찐 얼굴로 파격적인 발언을 내뱉곤 으스대는 얼굴을 하는 하람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게 허슬턴에서 자란 꼬맹이들이 생각할 발상이라면 발상이긴 한데… 권하람의 나이를 생각하면 도무지 저 나이의 꼬맹이가 내뱉을 뭔가는 아니었다. 내가 널 이렇게 키웠었나? 내가 술 먹고 쟤에게 무슨 헛소리를 한 거 아닌가? 지후는 맥주 캔을 기울이며, 새삼 새해에나 작심 반나절로 결심할 술 작작 처마셔야지…라는 결심을 조금 일찍 세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했다.

허나 뒤이어 나온 하람의 발언이 더 파격적이었다.

 

“산타는― 관음증이 있는 게 틀림없어!”

“풉! 커헉!”

 

맥주를 코로 뿜는 바람에 한참 동안 쿨럭거리던 지후는 (지후가 손가락으로 제 등을 가리키자, 하람이 조그만 손으로 등을 팍팍 두들겨 주었다) 한참 동안 켈록거리며 잘못 들어간 맥주를 빼낸 지후가 하람에게 물었다.

 

“…너 그게 무슨 뜻인진 아냐?”

“몰래 엿보는 사람이란 뜻이잖아! 쥐처럼. 찍찍.”

 

맞춤법도 다 틀리고 받아쓰기도 제대로 못 하는, 객관적으로 봐도 생각 없는 바보 그 자체인 꼬맹이 자식이 대체 어디서 저런 말을 배운 거야… 권지후는 한숨을 푹 쉬었다. 분명 저놈의 텔레비전이 원흉일 것 같았다. 하람이 리모컨을 다룰 줄 알게 된 이후로, 지후가 집에 없을 때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벼래별 TV 채널을 다 보는 게 틀림없었다. 수신료로 나가는 비용도 아낄 겸 내일 당장 TV 채널을 해약해야겠다고 (어차피 지후 본인은 바빠서 TV를 볼 틈도 없었다!) 지후가 마음속으로 결심하거나 말거나, 하람은 지후의 곁에 붙어 종알거렸다.

 

“산타가 진짜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참나, 어이가 없어서, 원.”

 

지후가 김 빠진, 어이없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리곤 하람의 등을 가볍게 툭 쳤다.

 

“이제 자라.”

“으응.”

 

그렇게 말한 하람이 상자 속에 들어 있던 쿠키 하나를 집어 들었다. 평소 같으면 입에 홀랑 넣었을 녀석이 쿠키를 들고 집구석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본 지후가 한 마디 던졌다.

 

“산타도 안 믿는 게 쥐새끼처럼 쿠키는 왜 가져가. 그냥 먹지.”

“산타 줄 거 아냐. 찍찍이 줄 거야.”

“어쭈? 산타도 안 믿는 게 상상 친구가 다 있네? 이건 좀 귀엽다, 야.”

“상상이 뭐야?”

“관음증이란 단어 뜻은 알면서 상상이란 단어 뜻은 모르냐, 바보야? 상상은 그러니까…”

 

아 망할. 분명 뜻을 아는데 막상 꼬맹이가 이해할 수 있을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하니 어려웠다. 지후가 잠시 머리를 굴리는 동안, 그 잠시의 틈도 안 주고 하람이 종알거렸다.

 

“언니도 모르면서 왜 나에게 바보라 그래?”

“알거든?”

“알면서 왜 말 못 해?”

“니가 알아먹게 설명을 해 줘야 할 거 아냐. 그러니까 상상은…”

 

하람이 뭐라 입을 열어 쫑알거리기 전, 지후가 잽싸게 말했다.

 

“니 머릿속에만 있는 거. 상상 친구란 건? 니 머릿속에만 있는 니만 아는 친구.”

 

지후의 말을 들은 하람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찍찍이는 상상 친구 아냐.”

“거짓말 하면 선물 내가 도로 뺏어간다, 꼬맹이.”

 

지후의 말에 하람은 억울한 듯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지후를 쏘아보았다. 지후 역시도 어쭈, 하면서 하람을 마주 노려보았다. 하람이 항변했다.

 

“진짜 있어!”

“뭐?”

“저기. 저기서 자주 보여, 찍찍이.”

 

하람이 해맑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집 한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지후도 채 눈치채지 못했던 쥐구멍이 있었다! 눈에 띄게 큰 쥐구멍이! 아, 망할. 요새 바빠서 집구석을 살펴보기는커녕 청소할 생각도 못 했더니 (물론, 권지후는 평소에도 청소할 생각 따위는 안 하긴 했다) 저딴 게 집에 생겼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지후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는 연신 헤실거리고 있는 하람에게 물었다.

 

“그…찍찍이 얼만한데.”

“쪼끄매. 요마아안큼.”

 

하람이 손으로 쥐 크기를 어림짐작해 보였다. 크기로 보아하니 새끼였다. 망할. 새끼가 있다면 이 거지 같은 닭장이 전부 쥐새끼 소굴이라 봐도 무방할 듯했다. 맘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방역업체를 부르고 싶었지만, 밤 열 시가 거의 다 되어갈 시간에 일할 방역업체 따위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지후는 한숨을 삼키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술에 꼴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는 부엌 한구석에 놓인 공구 상자를 찾으러 몸을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람은 히히 웃으며 쿠키를 쥐구멍 앞에 두었다.

 

“찍찍이도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는 개뿔이. 찍찍이가 권하람으로부터 메리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는 일 따위는 권지후가 있는 한 없을 것이다! 

 

**

 

지후가 공구 상자와, 덤으로 어디서 찾아낸 널빤지를 가져오는 것을 본 하람이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눈치채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새된 고함을 질렀다. 

 

“안 돼! 싫어! 하지 마!”

 

하람은 필사적으로 지후에게 매달렸다. 어떻게든 지후의 손에 들린 널빤지와 공구 상자를 빼앗으려고 애썼지만, 100㎝를 겨우 넘길까 말까 한 꼬맹이가 180㎝가 넘는 장신, 그것도 몸 쓰는 일로 생활형 근육이 이리저리 붙어 있는 이십 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람이 지후의 등 위에 올라타 귓전에 대고 악을 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후는 쥐구멍을 틀어막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람은 그런 지후를 보면서 새된 고함을 질렀다.

 

“언니, 아니 지후 미워! 찍찍이는 내 친군데!”

“응 걔는 너 친구로 생각 안 한대.”

“아냐! 지후가 뭘 알아!”

“그럼 넌 뭘 아냐?”

 

하람에게 공연히 쥐가 가져다주는 위험성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권하람은 그런 거에 전혀 개의치 않는 바보 꼬맹이었다. 그러니 공연히 쓸데없는 입씨름으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오직 신속한 행동만이 중요했다!

하람이 징징대는 것을 백색소음이나 노동요 삼아, 지후는 문제의 쥐구멍을 쥐새끼 수염 하나 들이지 못할 정도로 단단하고 꼼꼼히 틀어막았다. 제 동생의 찡얼거림이나, 벽을 뚫고 들려오는 한밤중에 왜 못질을 쳐 하고 지랄이냐는 이웃들의 불평불만은 깔끔하게 무시한 채로.

그런 수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쥐구멍을 단단히 틀어막은 지후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제가 메운 쥐구멍을 살폈다. 임시변통이지만 일단 새끼 쥐 수염 하나도 나올 것 같은 틈새 하나 없이 말끔하게 메운 듯했다. 제 실력에 속으로 자화자찬할 틈도 없이, 하람의 새된 고함이 지후의 귓전을 때렸다.

 

“지후 미워! 찍찍이는 내 친군데!”

“조용히 해라. 지금 몇 신줄 알아?”

“싫어!”

 

드물게 징징대는 제 동생을 보며 지후는 한숨을 삼켰다. 평소에는 투정부리거나 징징대는 일이 없다시피 한 녀석이 저러는 걸 보면 집에 혼자 있는 게 퍽 싫긴 했나 보다 생각하면서. 제가 제 손으로 돌보겠다 데려와 가족 삼은 녀석인 만큼 외롭게 하고 싶지 않은 건 지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식구가 먹고살려면, 적어도 비바람 피할 수 있는 이 닭장이라도 유지하려면 어쨌든 노동을 해서 그놈의 돈을 벌어야만 했다. 가족답게, 사람답게 살기 위해 결국은 외롭게 하는 굴레라니. 아이러니이자 좆 같은 현실이었다. 지후는 한숨을 삼키곤 하람을 향해 양팔을 벌려 보이곤, 말을 붙였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해보기 위해서였다.

 

“야, 꼬맹이, 하람아. 편의점에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평소 같으면 아이스크림 소리에 뽀르르 달려와 지후에게 안길 단순한 녀석이, 이번만큼은 용서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싫어! 지후 미워!”

 

아 진짜. 쥐알만 한 게 뭐 저리 고함은 잘도 질러… 하람의 고함에 신경을 긁힌 사람들이 궁시렁거리는 소리, 투덜거리면서 짜증을 내는 소리나 욕지거리를 내뱉는 소리가 방음 안 되는 벽을 타고 들려왔다. 지후는 하람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하라고 했지, 권하람.”

“싫어!”

“자꾸 그럴 거면 선물 도로 내놔.”

 

제가 생각해도 유치하고 치사한 방법이었지만, 이게 잘 먹힐 것 같았다. 그건 싫었는지, 하람이 입을 다물고, 반항적인 얼굴로 고개를 도리질 쳤다. 적어도 소리는 안 지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반은 성공했다. 이제는 저 반항적인 꼬맹이를 어떻게 진정시키는 일만 남았다. 억울해서 발을 동동 구르려던 하람을 본 지후가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고, 덕분에 갈 곳 잃은 하람의 발이 지후의 턱을 정통으로 걷어찼다. 아오 씨발, 드럽게 아프네, 지후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도, 하람을 들어 올린 채 쓰읍, 하고 주의를 시키었다. 지후의 꾸중하는 눈빛을 본 하람은 기죽기는커녕 되려 지후를 반항적인 눈으로 쏘아보았다. 불만이 가득한 노란색 눈동자를 보며 지후가 투덜거렸다.

 

“아, 또 뭐가.”

“찍찍이 살려내!”

“안 죽였어, 임마.”

“죽일 거잖아!”

“아냐.”

“거짓말쟁이!”

“어허, 아니라고 했다?”

 

권지후가 그놈의 ‘찍찍이’의 죽음에 결정적인 원인 제공을 할 진 몰라도 적어도 직접 죽이진 않을 터였다. 쥐덫이나 쥐약을 함부로 둘 순 없었다. 혼자 살았더라면, 혹은 하람이 조금 더 컸더라면 모르지만 아직 하람은 어린아이였다. 하람이 이보다 더 어릴 적, 지후가 먹는 싸구려 수면제를 사탕인 줄 알고 주워 먹었다가 한바탕 사달이 난 적이 있었던 만큼, 더 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기도 했고. (질 나쁜 싸구려 수면제라 다행이었지, 진짜였으면 애 하나를 골로 보냈겠다 싶었다)

하람이 볼멘소리를 냈다.

 

“지후 없을 땐 찍찍이가 내 친군데.”

“걘 니 친구로 생각 안 할 걸.”

“아냐! 지후랑 찍찍이는 틀려!”

“뭐가.”

“지후는 맨날 나 혼자 두고 일하러 가잖아.”

 

하람이 중얼거렸다. 지후는 그 말에 찔린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곧바로 반박했다.

 

“야, 맨날은 아니거든?”

“몰라, 미워.”

 

하람이 팩 돌아누웠다. 지후도 하람과의 협상, 혹은 달래주기를 포기했다. 더 이상 저 꼬맹이하고는 말이 안 통할 것 같았다. 저럴 때는 윽박지르거나 관심을 주지 않고 저 혼자 징징대게 냅두는 게 답이었다. 내일 눈뜨자마자 당장 할 것 그 첫 번째. 방역업자를 불러서 쥐새끼들을 전부 소탕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저 권하람의 시선을 쥐새끼 아닌 다른 데로 돌리는 일이었다. 복슬복슬한 쥐 인형이라도 하나 사다 줘야지. 돈이 좀 깨지더라도, 중고 말고 새 걸로. 인형에 대해서는 젬병이지만, 프로스페리티나,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나가서 더 엣지에 가면 부드럽고 폭신한 쥐 인형 하나쯤은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침 새해 즈음에 그 부근에 일하러 가기도 해야 했고.

 

징징대던 하람이 제풀에 지쳐 잠든 것을 본 지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냉장고에서 찬 맥주를 한 병 꺼내 하람의 옆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쭉 들이켰다. 그리고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는, 익숙한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내쉰 지후는, 색색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든 하람의 검은 고수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번거롭게 하고 앉았어. 망할 꼬맹이.”

 

그렇다고 해서 일을 쉴 수는 없으니, 적어도 연말부터 새해까지는 저 녀석을 데리고 일자리에 나가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저 녀석의 귀여움…은 모르겠고, 일단 동생을 홀로 둘 수 없다는 사정을 들이밀고 동정에 호소하면 대충 받아줄 사람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마음 아픈 현실이지만, 저 녀석도 고독에 익숙해지는 법을 일찌감치 배우는 수밖에. 어차피 어른이 되면 혼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뼈저린 현실은 일찌감치 깨달을수록 좋긴 했다. 특히 허슬턴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걸 일찌감치 알아도 힘든 건 힘들긴 한데….”

 

조부모와 함께 학교 생활과 생계를 병행하며 살던 옛날이, 그리고 그런 조부모를 공화로 하루아침에 잃고 다짜고짜 혼자서 생계에 뛰어들었던 옛날이 생각나 지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런 건 술로 잊어버려야 했다. 공화에 대한 원망도, 조부모에 대한 원망도, 그 외 후회니 뭐니, 차라리 잊어버렸으면, 느끼지 않았으면 좋았을 다른 감정들도….

 

그래도 권지후가 단 한 가지, 후회하지 않는 건 있었다. 공화에서 죽어 있던 제 엄마 품에 안겨 있었던 하람을 데리고 나온 것만큼은. 이만큼은 제가 살면서 단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데려와서 제 성을 붙여 주고 이름도 붙여 키우는 주제에 정작 먹고 사느라 가족다운 도리를 못 해주는 것에 대해 아쉬움은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저 녀석을 괜히 데려왔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일하는 게 힘들어도 말이다.

 

**

 

하람은 지후가 사다 준 복슬복슬한 쥐 인형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보자마자 폴짝폴짝 뛰며 기뻐했고, 꼭 안으며 인형의 복슬복슬한 감촉을 한껏 즐겼으니까. 지후는 그런 하람을 보며 픽 웃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수소문하고, 개중 제일 ‘복슬복슬하고 귀여우면서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봉제 인형’을 추천받은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비록 가격은 지후가 생각한 것보다 더 들었지만… 뭐,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솜 덩어리에 돈깨나 든 보람이 있었다.

 

“마음에 드냐, 꼬맹이.”

“응!”

 

하람은 기뻐 보였다. 찍찍이 2호, 라는 이름을 붙인 걸 보니 그 찍찍이인지 뭔지에게 상당히 (일방적으로) 정이 많이 든 모양이지만… 저 쥐 인형, 아니 찍찍이 2호가 있는 이상 관심이 금세 거기 쏠릴 게 분명했다. 어린아이들이란 그런 법이니까.

 

하지만 지후도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저 인형이 어린 하람의 외로움이나 쓸쓸함을 달래주진 못할 것이라는 걸. 어린아이를 오랫동안 저 혼자 두는 것도 좋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허나 제 수입으로는 시터를 부르기에는 턱이 없었고, 연인의 호의에 한없이 기대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제 연인도 본업이 있었으니까. 그저 하람이 저 혼자인 시간을 잘 버텨줘서 다행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람이 아무리 골 때리는 구석이 있는 바보 꼬맹이라 해도, 이런 쪽에선 은근히 손이 안 가는 녀석이라서 다행이긴 했다.

 

아무래도, 연말이나 연초에는 사람들에게 사정사정해서라도 일자리에 데리고 나가야겠다고, 권지후는 결심했다. 공화니 뭐니 그런 덴 못 데려가겠지만, 적어도 꼬맹이 하나 정도는 동정심으로 봐줄 사람들은 있지 않을까?

 

**

 

올해는 하람이 ‘살아남은’ 후, 정확히는 지후가 죽은 후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였다. 정말 혼자가 된 이후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는 생각보다 외롭거나 쓸쓸하진 않았다, 애초에 지후는 ‘제대로 된 회사’에 입사하기로 마음 먹은 이후, 자리를 예전보다 많이 비웠었다. 하람이 커서 제 앞가림을 어느 정도 하게 된 이후론 안심하고 자리를 더 비운 것 같았다. 네가 커서 다행이라는 말도 하면서. 그래서 더더욱 익숙했는지도 모른다. 나홀로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권지후는 영영 돌아올 일이 없다는 것이겠지.

 

하람은 머리가 조금 크고 나서는 밖으로 싸돌았다. 어릴 때는 그저 지후가 술김에 말했던 대로 따라만 했던 ‘돈이 없는’ 집안 사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허슬턴을 싸돌아다니며 ‘허슬턴 방식’으로 어느 정도 생계에 도움이 될 돈벌이를 지후 몰래 하곤 했다. 학교를 빠지는 것은 기본이었고, 지후가 들으면 기함할 일(그러나 허슬턴에선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일 중 하나이고, 지후도 잘 알고 있었다!)들도 하고는 했는데, 이것은 지후가 이렇게 하면 자기에게 관심을 써 주지 않을까, 하는 반항심도 약간 포함되어 있긴 했다. 처음 몇 번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지후는 제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그리고 어쩌면 생계를 이유로, 아니면 관심 안 쓰면 어련히 관두겠거니 하는 마음인진 몰라도 어지간해선 하람의 ‘돈벌이’에 큰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하람은 실망했다. 하지만 ‘돈벌이’를 멈추진 않았다. 어쨌든 자신의 ‘돈벌이’가 생계 문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지후가 납기일을 잊어버린 전기세나 수도세 등도 제 돈으로 보태 내고는 했으니까. 지후도 그 사실을 알기에 아예 하람의 ‘돈벌이’를 눈감아주는 것 같았다. 하람에게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이긴 했지만.

 

“담배를 피든 술을 마시든, 니 삶인데 내가 어디까지 신경 쓰고 간섭하겠냐. 너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어느 날인가 지후가 하람에게 한 말이었다. 마지막 말로 보아하니 지후는 하람이 집안 생계를 신경 쓰고 있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어쩌면 지후가 프리랜서 일을 그만두고, 제 적성에 맞지 않는 ‘안정적인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 데 하람의 이 ‘돈벌이’가 채찍질을 더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후가 죽은 지금 이것들은 그저 추측들 중 하나일 뿐, 지후의 속마음이나 진실은 알 길이 없었다. 이제 하람은 지후 없이 혼자서 살아가야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생계에 보태기 위해, 그리고 지후의 관심을 받기 위해 알음알음 해왔던 이 ‘돈벌이’들이, 조금이나마 하람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지후가 죽은 이후 하람은 지후가 그토록 왜 ‘안정적인 삶’을 원했는지 조금쯤 깨닫게 되었다. 보호자라는 지붕이 사라지고 난 후, 맨몸으로 맞는 현실이란 열네 살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무언가였다. 하지만 살아야만 했다. 어떻게든.

 

어떻게?

 

의문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봤자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끝이 날 인생이라면, 그 끝이 죽음이고 그것이 언제 찾아올지 그 누구도 모른다면―

―미래를, 앞으로를, 내일을 구태여 기대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먼 미래를 그려봤자, 미래는 어쨌든 불확실한 것.

불확실한 걸 꿈꿀 필요가 있을까?

 

중요한 것은 지금이니까.

살아남는 것이니까.

살아남는 데 꿈이나 희망 같은 건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꿈꾼다는 것은 곧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한다는 것. 기대한다는 것은 곧 바라고, 갈망한다는 것. 기대하지 않으면, 바라고 갈망하지 않으면 잃었을 때의 상처도 없으니까.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오로지, 지금뿐이다.

 

**

 

지후가 하듯이 담배를 태우며 담배 연기로 가슴 속 구멍을 메우고 있던 하람의 눈에 문득 하람의 눈에 띄는 물건들이 보였다. 지후의 물건들, 혹은 지후가 생각나는 물건들이었다. 왜 이럴 때 눈에 띄는 거지. 개중 저쪽 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쥐 인형이 눈에 띄었다. 세월이 흘러 그 털이 많이 뻣뻣해지긴 했지만, 분명 지후가 사서 안겨 주었던 기억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어렸던 제가 소중하게 안고 다니던, 그래서 인형이 필요 없는 지금까지도 버리지 못한 물건이었다…

 

하람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인형을 향해 손을 뻗었다.

 

… …… ………

………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이 솜투성이었다. 한 손에 쥐여진 면도날, 그리고 인형의 처참한 잔해를 보고 나서야 하람은 자기가 문제의 쥐 인형을 가차 없이 난도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이 따끔했다. 소매치기용으로 쓰는 작은 면도날을 쥐고 정신없이 난도질한 덕에 손이 베였기 때문이다. 베인 곳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허나 손이 베인 고통은 뒷전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섞인 탓에 머릿속이, 가슴 속이 울렁이고 답답했다.

 

견딜 수 없다.

 

하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집안을 뒤적여 대용량 쓰레기봉투를 찾았다. 피가 묻은 면도날은 잘 싸서 버리고, 난도질당한 인형의 잔해와 지후가 생각나는 물건들을 눈에 띄는 대로, 마구잡이로 집어넣었다. 물건들이 하람의 눈에 띄지 않게 되자, 봉투가 꽉 찼다. 10여 년의 추억의 부피와 무게는 얼마 없는 것 같아도 무게가 상당했다. 하람은 봉지 입구를 꽉 묶었다. 그리고는 묵직한 봉투를 들고 집 밖을 나섰다. 봉투의 무게가 실제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오토바이 하나를 ‘가져다’ 탄 하람은 짐을 실은 채 그대로 내달렸다. 아무도, 그 자신조차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이것들을 버려야 했다.

 

**

 

바닷가에 도착한 하람은 제가 들고 온 봉투를 바다에 가차없이 내던졌다. 영영 가라앉아 버려서, 자신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기를 바라며. 봉투를 던지는 순간 이 일을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제 마음을 다잡았다.

 

첨벙 하고 무거운 쓰레기 봉투가 바닷물에 처박히는 소리가 났다. 이제 끝이었다, 아마도. 그럼에도 마음이 완전히 후련해지지 않았다. 여전히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하람을 사로잡고 있었다. 어디에 대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해소될 감정이 아니었기에, 소리를 지르려다 말고 그냥 몸을 돌렸지만.

 

하람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박았다. 주머니 속에 딱딱하고 네모진, 무거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꺼내 보니 지후가 항상 지니고 다니던, 지후의 이름 세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지포 라이터였다. 지포 라이터를 본 순간, 그때 공화 속에서 벌어졌었던 일이 떠올랐다. 생생하게. 언령사로써의 재능은 있었지만 언령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던 자신에게, 지후가 확실한 예시로 ‘보여주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다. 하람은 이마저도 바다에 던져 버리려고 했다. 몸을 다시 바닷가 쪽으로 돌리고, 라이터를 쥔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허나, 이것만큼은―

이것만큼은 다른 것처럼 쉽게 던져 버릴 수 없었다.

 

버리면 후련해질 텐데.

지후에게서 ∎∎∎ ∎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것마저 버리면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 같았다.

 

라이터를 쥔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 하람은 다시 라이터를 주머니 속에 쑤셔 박았다. 그리고는 오토바이를 타고는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야시장에 들러서 만두나 찐빵이라도 한두 개 훔쳐 먹을 생각이었다. 아니면 어디 허슬턴 지리를 몰라서 진입하지 못해 쩔쩔매는 공화 업체가 보이면, 길 좀 알려 주고 푼돈이라도 받아 내든가. (보통 이런 업체는 돈이 없어서 액수를 많이 주진 못하는 편이었지만, 그마저도 어린 하람에게는 족했다)

 

**

 

이제는 홀로 지내는 것도 익숙해진 스물네 살의 하람은 여느 때처럼 지독하게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왔다. 허슬턴의 공화를 꺾으러 온 민간 업체의 빈자리에 ‘땜빵’으로 끼어들어 일했고, 그것도 모자라 불법 도박장에서 바람잡이 일까지 하고 온 참이었다. 몇 년 동안 먹고 살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이 일 저 일 구르고 뛰다 보니 자연스레 언령을 활용할 수 있는 쪽으로도 일하게 됐다. 개중 예를 들자면, 오늘처럼 공화 진입 인력이 부족하거나 허슬턴의 지리를 잘 몰라 어찌할 줄 모르고 발을 구르는 민간업체 사람들에게 접근해 능청스레 도움을 주겠다, 단 보수는 받겠다고 접근해 즉석에서 일을 따내거나 하는 식이었다. 덕분에 입소문이 난 모양인지 종종 민간 업체로부터 ‘손이 비는 데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거나, 그를 개인적으로 찾아와 일을 부탁하는 사람들도 좀 생겼으니까. 잘된 일이었다. 차라리 이쪽이 그래도 시간당 돈을 더 많이 벌긴 했으니.

 

집에 돌아온 하람은 생전의 지후가 했듯 발은 신발장에 두고, 옷을 입은 채 바닥에 그대로 풀썩 쓰러지듯 옆으로 누웠다. 옆으로 누운 채 닭장만한 집안을 둘러보고 있자니, 문득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 눈에 띄었다. 사진이 든 액자였다. 하람은 발만 흔들어 대충 신발에서 발을 허물 벗듯 쏙 빼내고는, 기다시피 비척비척 바닥을 기어가 액자를 손에 쥐고 들여다보았다. 시원시원한 미소를 짓는 지후의 모습과 막 이갈이를 해서 앞니가 시원하게 빠진 어린 자신이 웃고 있는 사진이 담겨 있는. 그때 채 못 찾아낸 지후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 같았다.

 

하람은 그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버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는 이겨낸 것 같았으니까, 아마도.

 

아마도.

 

사실 그렇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알게 되는 건, 조금 더 미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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