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 변해 가는 ■■
자, 매사냥꾼이 그들에게 부탁한 목적도 달성했겠다, 이제는 한숨 돌릴 시간이다. 일련의 목적도 달성했으니, 당분간은 매사냥꾼들과 협력할 일은 없어 보였다. 월터는 두앗의 거리를 걸었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하루는 너무나도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대신 신발 밑창이 닳도록 도시 이곳저곳을 살핀 덕에 이 거리도 상당히 익숙해진 터였다. 두앗 주민들 중에서 월터를 눈여겨보는 사람도 몇몇 있는 것 같았다. 비록 월터는 그들의 얼굴이 낯설었지만. 아무래도 저번에 꽃게형 괴수들을 잡은 탓에 월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있는 모양이었다. 월터에게 고개를 까닥여 알은체하는 사람들을 향해 마주 고개를 까닥이는 것으로 인사를 해 보인 월터는 다시 가던 길을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목적지도 없이 산책하는 척 하지만 두앗의 골목을 면밀히 살피고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동시에 월터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사탕이 거의 떨어져 가던 작업복 앞주머니에는 록산나가 가져다 준 사탕으로 다시 가득 찼지만, 그 사탕들에는 손대지 않은 채였다. 사탕에 의존하지 않고 결단을 내릴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월터 워커는 알았다.
바르톨로의 말처럼, 어쩌면 알키마드도, 두앗도 완전한 답이 아닐지 모른다. 애시당초 '낙원' 이란게 존재하던가? 알키마드도 완전한 낙원은 아니다. 알키마드의 아웃스커트 출신인 월터 워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살만한 문명과 터전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완전한 낙원이고, 이상향이 아닌 것을.
바르톨로는 알키마드도, 두앗도 아닌 제 3의 답을 내린 것 같았다. 그리고 바르톨로가 제시한 답, 그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미 개척되고 다듬어진 곳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유민이던 월터의 부모님도 어찌어찌 삶의 터전과 그 기틀이 마련되어 있는 아웃스커트에 들어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둥지를 틀어 정착하기까지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들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의 자식, 원래 월터라는 이름을 받게 될 자식을 잃었다는 말도 들었었다. 아무튼, 자신의 부모님처럼 이미 ‘알키마드’, 혹은 ‘아웃스커트’ 라는 형태로 기틀 혹은 기조가 마련된 곳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도 힘든 일인데, 아무것도 없는 곳, 제로부터 시작해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것은 아무리 선조들의 지식이 있다고 해도 새로운 땅을 밟아 다지고 개척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바르톨로는 그런 힘든 길을 걷고자 하고 있었다. 분명 그 길은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겠지. 하지만 그에게는 포부가 있었다. 새로운 도시를 세우겠다는 목표. 이것은 바르톨로가 알키마드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 3의 수단으로 택한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포부뿐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시도해봐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월터는 바르톨로가 추구하고자 하는 도시가 어떤 모습일지는 몰랐지만, 그것이 알키마드의 형태도 아니고 두앗의 형태도 아닌 전혀 새로운 도시일 것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알키마드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르톨로는 알키마드와 그 체제, 계급과 신분 차이 같은 고질적인 문제에 대한 화제가 화두로 오를 때마다 그것들에 관해 신랄하게 비꼬고 비판하고는 했으니까.
그와의 대화로 월터는 조금쯤 자신이 처한 처지를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바르톨로와 대화를 나누던 그때는 이 불공정에 분노하거나 울분을 터뜨린다 해도, 자신이 처한 처지가 바뀌거나 180도 달라지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월터 워커는 아웃스커트에서 그렇게 살아왔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숱하게 봤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근육이 끊어지고 뼈가 부서져라 일한다 해도 바뀌지 않는 진흙탕 속의 삶. 그마저도 현상 유지나 하면 다행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훨씬 더 많아, 아무리 그 속에서 필사적으로 발장구를 쳐도 빠져나오기는커녕 잠겨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인 진흙탕 속 지리멸렬한 삶에 좌절하는 아웃스커트의 사람들을. 개중에는 시민권만 생기면 자신의 운명이 한순간에 바뀌리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은 그토록 원하던 시민권을 얻었음에도 크게 바뀌지 않은 자신의 인생에 절망했다. 그의 부모님, 워커 부부 역시도 시민권을 얻은 알키마드의 시민이었지만, 월터가 보았을 때 워커 부부 역시도 체류민이었을 때의 삶과는 크게 바뀐 것 없는 삶을 몇십 년째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아웃스커트의 주민 대다수가 이 지독한 불공정에 분노하다 못해 지쳐 좌절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육체와 생명을 깎아봐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하루 치 유흥을 쫓고는 했다. 혹시라도 모를 '대박'을 위해 도박에 손을 대거나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지독한 삶을 잊으려고 시작한 것들이 자신의 인생과 주변 사람의 인생마저도 지독하게 갉아먹어 버린 경우도 숱했다. 무기력에 빠지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대하지 않는 것. 자신의 운명이 달라질 것을 기대하지 않고 순응하는 것, 그러려니 하고 이 팔자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월터 워커는 이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무언가 하나를 얻는다고 해서 극적으로 바뀌는 것이 없는 것- 그것이 삶이며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울며불며 저주해봤자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그래서 평범하고 평온한 인생, 굴곡 없이 어제와도 같은 오늘이 계속되는 삶을 추구했다.
월터 워커의 인생은 오퍼레이션 마아트에 지원한 이후로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 전부터 카렌의 '스카우트' 이후 특수부에 들어가겠다 마음먹은 이후로 월터 워커의 인생이 전환점을 맞이했을지도 몰랐다. 카렌의 스카우트는 그 방식이 꽤 과격했지만, 월터에게 카렌 S.예거라는 사람에 대한 각인 하나는 확실히 남겼다. 에스퍼로 각성했음에도 특수부는 자신의 인생 루틴에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월터가 특수부에 들어가게끔 마음을 먹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특수부에 들어간 이후부터 인생이 급격히 바뀐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낯설었던 두앗이라는 도시도, 며칠 지냈다고 익숙해져 있는데 말이야. 몇몇 거리는 이제 눈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월터는 생각을 정정했다. 어쩌면 자신이 누리는 이 평범한 일상 역시도, 지금까지 익숙해 온 것을 버리고 뛰어들지 못했던 일에 과감하게 뛰어들어 벽을 부수는 도전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에 강렬한 경험이 아닌 대다수는 당연한 듯 잊어버린 것이라고.
어디 내세울 특출난 재주나, 가방끈이 길지 않은 없는 범인(凡人) 그 자체인 월터 워커가 사회에서 돈을 벌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있든 없든 수많은 일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월터 워커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자기를 받아주는 곳이면 어디든 비집고 들어가 일했다. 몸 쓰는 일이든, 서류 작업이든, 단순 노동이든 아니든 간에. 당연하지만, 월터 워커는 초짜가 저지르는 실수와 실패를 숱하게 했다. 몇 번이고 애먹고 꾸중과 충고를 들으며 반복한 끝에 기술과 요령을 터득했다. 터득하고 난 후에는 숨을 쉬듯 일련의 행동을 반복하다 보니 그것들이 몸에 익었다.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던 일이 나중에는 몇 인분의 일도 거뜬히 해낼 수 있었다. 입소문이 모이자 알선 업체를 제하고도 사람들을 통해 일거리가 들어왔다. 그렇게 모인 것들이 일상에 스며들었고, 익숙하기 그지없는 일상의 일부분으로 굳어 하나둘씩 자리를 잡아 갔다.
자진해서든, 자진하지 않든 인생에 예상치 못한 일은 하나둘씩 다가오기 마련이고, 개중 불가항력인 일들, 피할 수 없는 일들도 꽤나 됐다. 월터 워커는 되도록 그런 일들을 피하려고 애썼으나, 피할 수 없는 균열들은 평범한 삶에 큰 흔적을 남기곤 했다.
그가 평범한 일상에 자진해서 첫 번째 균열을 일으킨 때가 언제였을까? 정확한 ‘첫 번째’는 모르지만 월터가 기억하는 바로는 그가 자진해서 자신의 일상에 균열을 일으킨 것은 역시 카란과의 만남, 카란의 일에 참견한 것이었다. 그 일을 어떻게 잊겠는가. 월터 워커가 인생 첫 번째로, 본인이 자진해서 남의 일에 참견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카란과는 그 ‘참견’을 계기로 친구가 되었고, 그 우정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월터 워커는 오퍼레이션 마아트의 작전 ‘실패’, 그리고 두앗에서 보낸 짧은 시간 동안 알게 되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누리고 지키고자 했던 평범한 일상이 사실은 수많은 균열과 도전을 일으킨 끝에 다져놓은 결과물이라는 것을. 자진하든, 자진하지 않든 그런 삶을 뒤흔들 균열은 인생에 한두 번쯤은 찾아오게 된다. 아직은 그 균열이 월터 워커의 삶을 근간까지 뒤흔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람의 삶에서 한 번쯤은 기존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가 온다고 했던가.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다고 월터 워커는 생각했다. 아무리 고민하고, 피하려 해봤자 어쨌든 월터 워커는 터무니없는 일에 휘말렸고, 휘말린 이상은 피할 수도, 돌이킬 수도, 보류할 수도 없었다.
뭐가 되었든 언젠가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어떤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자신이 내키지 않는 선택지를 배제하고 나면 어느 정도 골라야 할 길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다수에게 제일 나은 선택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월터 윌리엄 워커 자신에겐 제일 나은 선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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