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의 수레바퀴

하람 | 어느 결계술사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하루

<span class="sv_member">닌닌</span>
닌닌 @ninjaman
2026-03-29 21:12

평범한 하루다. 수면실에서 한잠 푹 자고 일어나 이부자리 속에서 몸만 쏙 빠져나오고선, 엉망진창인 푸석한 회갈색 반곱슬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건성건성 빗어 모자 속에 대충 숨겨 놓고, 현장에 가든 가지 않든 항시 걸치고 다니는, ‘KS’ 로고가 새겨지지 않았더라면 유니폼인지도 의심스러울 지경으로 보일 정도로 구겨지다 못해 어육소시지 냄새가 희미하게 밴 남색 오버핏 항공 점퍼에 건성으로 양팔을 집어넣고선 ‘어제 긴급 출동으로 공화 해결하느라 밤샘 근무했으니 이런 추레한 모습이라도 대충 그러려니 하고 봐주시지 않으려나~’ 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동시에 입가의 마른 침 자국을 옷소매로 대충 닦으며, 뒤축을 꺾어 신은 운동화를 질질 끌고 지정된 사무실로 출근하는 그런 평범한 하루. 그런 꼴로 사무실로 입성한 자신을 팀장님이 자신을 지긋이 보거나 말거나 (평소 팀장님의 태도로 보아 아마 일주일 전 시말서 작성 급으로 사고를 쳐놓은 여파가 아직 풀리지 않았든가, 아니면 입가에 채 덜 닦아낸 침 자국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연체동물처럼 흐느적흐느적거리며 사무실에 들어와 책상에 앉자마자 어제 까먹고 치우지 않은 어육소시지 껍데기가 산더미같이 쌓인 것을 보고선 대충 쓰레기통 안에 집어넣고 있자니 동료 직원 모치즈키 요모기가 슬며시 다가와 오늘 팀장님 기분이 좋지 않으니 조심하라, 고 작은 목소리로 넌지시 충고를 주고 가는 하루. 산더미 같은 서류에 글씨를 입력하다가 귀찮다, 고 아무 생각 없이 문득 입 밖으로 꺼낸 그 한 마디 때문에 ‘그날 조금 기분이 나빴던’ 상사에게 느슨한 태도에 대해 잔소리를 한 바가지 듣는 그런 아주아주 평범한 하루였다.

권하람은 고개를 살짝 숙여 상사에게 고분고분한 태도, 진심 어린 반성을 보이는 척하며 소리 없이 하품하는 동시에 상사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려 넘겼다. 이 ‘상사-잔소리-고분고분-듣는-척-하면서-무시하기’ 스킬은 단지 오늘 하루만 생각하며 흘러가는 듯 살던 그가 얼결에 흘러가듯 (혹은 납치당하듯) KS에 입사한 지 일 년 만에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한 기술 중 하나였다.



“임마, 권하람! 너, 내 말 듣고는 있냐?”
“어, 네?”
“허, 이 자식 봐라. 귓등으로도 안 들었구만?”


끊임없이 쏟아지던 팀장의 잔소리를 가로막은 것은 호출이었다. 흔한 일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하람에게 일을 맡겼다. ‘됐다, 이 이상 내 속 태우지 말고 가서 태울 걸 태워라’라는 말은 덤이었다.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팀장급이 개입해야 할 정도로 그렇게 심각한 공화는 아닌 모양이었다.


“야 권하람! 이번엔 잘해라? 네 가관이다 못해 아사리판인 시말서 꼬락서니를 또 보고 싶지 않으니까.”
“네에, 네에.”
“대답은 한 번만 해라, 좀.”


상사는 관련 공화에 대해서 간략한 브리핑을 해 주었다. 발생한 지 얼마 안 되는 C급 공화고, 다행히도 위험도가 보통 사람들과 공존할 수 있는 수준 정도라고 했으나 집값 문제라든지, 집값 문제라든지, 하여튼 집값 문제 때문에 얼른 해결해야 한다는 공화라고 했다. 그는 하람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마침 은근슬쩍 텀블러를 채우려는 척 자리를 피하려고 하던 검은 머리카락의 직원을 불렀다.


“어이, 모치즈키 주임!”


모치즈키 주임이라고 불린 이, 모치즈키 요모기는 한숨을 쉬면서 몸을 돌렸다. 상사의 명령은 절대적이기도 했으나, 무엇보다도 지독할 정도로 성실한 성격인 그는 이런 일에서 넉살 좋게 빠져나가는 요령이 없는 요령 없는 사람이었다.


“하아, 또 저예요? 누가 보면 권하람씨 전담인 줄 알겠네요.”
“아니었냐?”
“우연한 악연이죠. 머피의 법칙, 운명의 장난이랄까.”
“하여튼 네가 얘 사수? 암튼 비스름한 거였잖아. 너희 좋든 싫든 거의 붙어 다니시다시피 한 사이 아냐? 좀 친해지지 않았냐?”


그 말을 들은 요모기가 말했다. 단호한 어조였다.


“사수 아니고요, 전~혀요. 저희 안 친해요. 어쩌다 보니 비슷하게 불려 다녀서 그렇지.”
“아무튼, 내 머리털 살린다는 셈 치고 같이 가줘. 아무리 공존 가능한 급의 공화라 해도, 만에 하나 권하람이랑 엮여서 일 터지면 그 일이 크든 작든 내 머리에 솜털 하나 남지 않을 거다.”
“알겠습니다. 브리핑은 들었으니 다시 말씀하실 필요는 없어요.”
“어휴, 역시 모치즈키 주임이야. 내 머리카락의 은인! 걱정 덜었다! 자자, 2인 1조 완료. 가서 해결들하고 오셔. 자자!”


두 사람은 상사의 재촉에 인사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문밖으로 밀려 나갔다. 내 머리털이든, 두피든 여기에 보험을 들든가 해야지 원, 팀장이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에 들렸다.


사무실 밖으로 나와 주차장이 위치한 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탄 요모기가 하람을 한껏 쏘아보며 말했다. (비록 상사 앞에서는 부정했지만, 그도 하람과 함께 술을 마실 정도로 친한 사람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내가, 경고했건만, 이 자식이, 결국 사달을 냈네, 사달을 냈어.”


너 제발 생각 좀 하면서 살라니까? 요모기가 성을 내며 말을 이었다.


“출세는커녕 짤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아니? 출세는커녕 생각 없이 살다간 일찍 죽을 거야, 너.”
“그런 먼 미래의 일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 요모 형.”
“이젠 신기할 것도 없지만, 경이로울 정도로 진짜 대충 산다, 너.”


짧게 한숨을 쉰 요모기가 말을 이었다.


“내가 이 바닥에서 십 년 가까이 일하면서 사람들 죽어 나가는 걸 숱하게 봤는데, 넌 참…죽어도 그냥 올 것이 왔다고 말할 것 같다, 야.”
“좋지 않나? 울 일 많은데 덜 울게 해줘서.”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기할래? 오늘 당장이라도 내가 죽으면 요모 선배가 우는지 아닌지.”
“재수 없는 소리 마, 이 자식아. 그리고 본인이 죽으면 내기가 뭔 소용이야. 내가 우는지 아닌지 확인할 길도 없잖아?”


그렇게 서로 내용이 험악한 말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두 사람은 이동수단을 대 둔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쨌든 하람이 생각이 없을 뿐 악의라고는 한 톨도 없는 녀석이란 것은, 직장 선배이자 그의 사수 비스름한 것으로 (정확히는 악연인지, 의도적인 배치인지는 몰라도 일 년 동안 비슷하게 팀을 옮겨 다니거나, 그도 아니라면 협력 과정에서 만나게 되거나 한 사이였다) 일 년 동안 지내다 보면 알게 되는 일이었다. 비록 오늘은 하람의 태도에 잔소리를 퍼붓긴 내긴 했지만, 몇 개월 동안 합을 맞춰 본 팀장 역시도 권하람이라는 인간이 매사 생각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잘 알 터였다.



공화에 진입하기 전, 하람이 셔츠 앞섶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어딘지는 몰라도 식당 카운터 앞에 놓여 있는 판촉 라이터 중 하나였다. 하람이 숙달된 솜씨로 손 위에서 라이터를 돌리는 양을 보던 요모기가 혀를 찼다.



“아직도 매개체가 필요하냐? 기술연구부 사람들이 보면 울상이겠다 야.”
“눈에 보이는 형태가 있으면 편하지. 아무래도 이미지 잡기가 훨씬 쉽잖아?”


언령사 재능이 ‘상사-잔소리-고분고분-듣는-척-하면서-무시하기-’스킬만큼 빠르게 성장했으면 좋았으련만, 여전히 그 부분은 크게 진척이 없었다. 그래도 KS의 정사원으로서 밥값은 할 정도니 본인은 딱히 유감은 없었다. 비록 일 년 동안 하람에게 달라붙어 기술의 연마를 도왔던 기술연구부 사람들은 그와 의견을 달리하겠지만, 그건 그들의 문제였지 권하람의 문제는 아니었다.


하람 본인도 본인의 언령사로서의 재능에 대해서는 그냥저냥 밥값만큼은 할 정도라고만 생각했다. KS의 결계대응본부에서 결계술사로서 그럭저럭 밥값은 할 정도라면 결코 ‘평범한 언령사’라고는 할 순 없겠지만, 차고 넘칠 정도의 재능이나 그것을 뛰어넘는 기교를 가진 사람들이 수두룩한 게 이 업계였다. KS의 정사원으로 소속된 결계술사들을 보았을 때, 하람 정도면 평범하디 평범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입사 후 기술연구본부 소속 사람들과의 협력으로 다듬기는 했어도, 그의 언령은 지원이 필수 불가결이나 다름없어 그의 곁에는 항상 그를 보조해 줄 사람들이 따라붙고는 했다. 이쯤되면 KS에 대체 어떻게 입사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지만, 언령사로서의 능력이나 자질이 충분해 보이는 사람들이라면 무조건 영입하고 보는 게 이 바닥이었고 말이다.


아무튼, 그 덕분에 하람은 ‘자기 팔자에도 어울리지 않게 과분할 정도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많이 만나보기는 했지만, 그것이 하람의 출세에 관련된 인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단지 연락처 목록이 추가되는 정도, 필요에 따라 지원 요청으로 부르거나, 나아가 오늘 당장 같이 술을 마시거나 놀러 가자고 부를 사람 목록이 늘어나는 정도였다.


그래도, 하람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어차피 오늘 하루만 사는 데 지나치게 많은 것은 필요 없으니까.


‘아마 이런 느슨한 점, 그리고 대충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점이 되려 저 녀석의 사고방식을 느슨하게 만드는 거겠지.’


하람이 라이터를 딸각이는 양을 보며 생각하던 요모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런 점만 보면 네 로바타이프를 한 번쯤 의심하게 된다니까.”
“스베차에 재능 있는 언령사가 많다 뭐하다 하는 거? 편견이야 언니.”
“뭐래, 그거만 빼면 스베차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단단하게 만드는 스베차면서.”


요모기의 말을 들은 하람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그가 속한 로바타이프인 스베차는 단체생활이 필수 불가결이나 다름없는 사회적 동물에게 따라붙는 수식어 중에서도 불명예스러운 수식어란 수식어는 다 따라붙는 로바타이프였다. 실제로 언령사와의 재능과는 별개로, 결계술사로서의 적성도 매우 낮은 편이라는 유의미한 통계도 있었다. 그와는 별개로 재능 있는 언령사들이 많은 로바타이프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극소수의 사람일 터였고, 권하람은 절대 그 범주에 들지 못할 것이었다. 일단 누가 봐도 라이터를 매개체로 삼는 이상 하람은 ‘사고방식이 유연하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하다’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면 멀지 가깝지는 않아 보였다.


하람이 씩 웃으며 요모기를 향해 손가락을 장난스레 까닥거려 보였다.


“요모 누나는 로바타이프에 스스로를 가두는 타입? 혹시 혈액형별이나 별자리별 성격도 믿어? 오늘 아침 운세 같은 거 매일매일 체크해? 오늘 운세는 어땠어? 혹시 몇 등 했어~?”
“아오, 시끄러.”


어처구니없어하다 못해 짜증이 치밀어 오른 요모기가 발을 들어 올려 하람의 오금을 걷어차려 했다. 하람은 능숙하게 그 발길질 공격을 피했다. 폼이 능숙했다. 어쭈? 눈썹을 치켜든 요모기가 하람을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거 봐라?”
“내가 요모 오빠 공격을 하루 이틀 받아봐? 그리고 나름 최전방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던 사람이라고. 이 정도도 못 하면 메인 딜러 실격이지.”


느슨한 미소를 지어 보인 하람이 라이터를 들지 않은 손으로 비뚤어진 모자를 고쳐 썼다. 공화 지역으로 한 발 내딛으려다 만 하람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요모 오빠.”
“왜.”
“그래서 오늘 아침 운세 몇 등이었어?”
“알아서 뭐하게?”
“일 잘 안 풀리면 요모 누나 운세 등수 탓 하려고.”
“이게 진짜?”


멕이는 거냐, 이 자식아! 요모기가 손을 들어 하람의 등짝을 짝 소리나게 내리쳤다. 이번 공격은 순순히 맞아준 하람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어우, 삐지지 마~ 나 요모 오빠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 알잖아?”
“안 삐졌거든?”
“소시지 줄 테니까 화 풀어, 응?”


하람이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어 주머니를 뒤적였다. 비닐 쓰레기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용물을 까먹고 버리는 것을 잊어버린 소시지 비닐 껍데기들, 피젯 스피너와 껌, 캐러멜 막대사탕 포장지들이 차례로 나왔다가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들은 하람이 지금까지 금연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증거를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들로, 간단히 말해 진즉 버렸어야 할 쓰레기들이었다. 채 버리는 것을 잊어버린 쓰레기들이 뒤엉켜 있는 불룩한 항공 점퍼 주머니를 바스락거리며 ‘자신의 화를 풀 만한 어육소시지’를 찾아 뒤적이는 꼴을 보다 못한 요모기가 눈을 부라렸다. 준다 해도 받을 생각도 없었지만 소시지의 위생 상태가 조금은, 아니 심히 의심스러웠다. 아무 생각 없다 하더라도 이건 좀 너무 나가지 않았냐? 요모기는 단호하게 하람의 호의를 거절했다.


“너나 많이 드세요. 그리고 공화에 한 발짝이라도 들이밀었음 긴장 좀 해 인마. 브리핑은 귓등으로 들었냐? KS의 결계술사로 1년쯤 굴렀으면, 아무리 일반등급 공화라고 해도 이제는 긴장을 조금쯤 탈 줄은 알아야지?”


요모기가 말했다. 공화의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한, 다소 냉정한 어조였다. 타고난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인명 피해가 없는 이상 소규모 공화, 안전등급 공화와 공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허슬턴 토박이라는 배경 때문인지, 그 둘이 합쳐져 나온 결과물인진 모르지만 요모기 입장에서 공화를 대하는 하람의 태도는 지나칠 정도로 느슨했기에 한 번씩은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얼핏 봤을 때 지금은 ‘안전한’, ‘공존 가능한’ 공화라고 해도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어떠한 형태로 변질할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니까.


“알았어요, 알았어.”


공화 지역으로 완전히 들어선 하람이 라이터를 찰칵여 불을 켰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주변에 환한 화염 덩어리가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덩이 세 개를 만들어낸 하람이 요모기를 보며 나른하게 웃었다.


“일단은 이 정도로 충분하겠지? 야무진 보조 부탁해요~”
“십 년 가까이 근무한 결계술사 짬을 뭘로 보냐?”
“음~ 든든하네. 자 그럼,”


하람이 말했다.


“귀찮지만 일하러 가볼까요? 요모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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