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람 | 기억을 되짚어 보던 어느 하루
개인로그
칠흑 같은 아수라장 속에서 하람이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주위를 비추는 불꽃.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불꽃이다. 그 불꽃의 빛깔은 아름답고 선명한 녹색이다. 그 불꽃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낸 불꽃의 주인, ‘언니’의 눈동자 빛깔과 똑 닮은 빛깔의―
‘언니’의 불꽃이다.
***
서류 작업과 씨름하던 하람은 진도가 나가지 않자 공연히 의자 위에서 빙글거렸다. 제시카가 있었다면 도와달라고 부탁했을 텐데. 하람은 제시카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KS 내에서도 워커홀릭으로 소문난 그는 애석하게도 ‘출타 중’ (하람이 최근 알게 된 단어였다) 이었다. 드베르토 팀장 역시 자리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출타 중’인 것 같았다. 다른 팀원들 역시 다들 제각각의 이유로 바쁘거나, 개중에는 급하게 결원이 발생한 다른 팀이나 임시 팀에 지원을 나가거나 했기 때문에 하람을 도와줄 여력 따위는 없어 보였다. 한산한 A팀 사무실에서 하람은 한참 의자 위에서 빙글거리고, 주머니 구석에 처박혀 있었던 피젯스피너를 꺼내 빙글빙글 돌려 보기도 했다. 피젯스피너 돌리기에도 질려서 볼펜을 돌리던 하람의 손이 미끄러졌다. 하람의 손에서 미끄러져 날아간 볼펜이 사무실 한구석에 있던 무언가에 푹 소리를 내며 꽂혔다. 뭐지? 하고 다가가 보니 잭-오-랜턴이었다. 할로윈이 곧이라며, A팀의 야무진 누군가, 혹은 이벤트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잊지 않고 야무지게 만들어 갖다 둔 것도 모자라 속에 촛불까지 밝혀 놓은 게 제법 본격적이었다. 하람은 잭-오-랜턴에 박힌 볼펜을 빼냈다. 그리곤 볼펜을 손에 쥔 채, 불이 켜진 잭-오-랜턴을, 정확히는 속을 비워낸 호박 안에서 타오르는 촛불의 불길을 가만히 응시했다. 잭-오-랜턴과 눈싸움이라도 하려는 기세였다. 이맘때 즈음 불꽃을 보고 있으면 불현듯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겹쳐 떠오르고는 했다.
현재만 살아가는 듯한 권하람도 불현듯 옛일을 떠올릴 때가 있었다. 특히 할로윈이 가까워져 올 때 즈음이면 더더욱. 하람은 할로윈의 정확한 유래는 몰랐지만 (‘그냥 귀신 분장하고 사탕 받으러 다니고, 호박이 유독 많이 굴러다니는 날 아냐~?’), 귀신이니 유령이니, 망자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언급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햇수로 십오 년 전쯤 명을 달리한 자신의 ‘언니’―정확히 말하면 보호자를 떠올리고는 했다. 이젠 둘이 함께 보낸 인생보다 하람 혼자서 보낸 인생이 더 긴데도, 그랬다.
‘보고 싶네~’
누군가 하람에게 ‘언니’가 보고 싶은가, 하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누군가가 먼저 언급하지 않는 이상은 먼저 보호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굳이 먼저 언급할 이유도 없긴 했다. 이곳에선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경험은 흔해 빠진 일이었고, 특별히 불행하다고 말하고 다닐 뭔가도 아니었으니까.
딸각, 딸각, 딸각.
하람은 은색 지포라이터를 꺼내 딸각였다. 하람이 열네 살 때 명을 달리한 언니의 유품으로, 하람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수도 없이 많은 라이터 중에서도 유일하게 하람이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리지 않고 있는 라이터 중 하나였다. 구석에 작게 권지후, 라는 세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진 물건이었다. 이 라이터의 원래 주인, 하람의 보호자였던 ‘언니’의 이름이었다.
지후는 하람이 세 살인가 네 살 즈음에 허슬턴 어느 지역에서 발생한 공화와, 그에 이어 연쇄적으로 벌어진 사고의 여파로 부모를 잃은 하람을 공화 속에서 주워다 제 성과 이름을 붙여주고 키워준 사람이었다. (하람은 지후의 표현에 의하면 ‘천만 다행히도’ 이때와 이전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잘됐어, 평생 기억나지 않는 편이 좋을걸’, 하고 지후가 말했다. 사실 지후가 그렇게 말한들, 하람은 너무 어렸기에 기억이 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제 인생에 하늘에서 벼락처럼 갑자기 떨어진 사람이라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을 줄여서 하람이라고 지었다고 말하는 것은 덤이었다. 하람과 열여섯 살 차이가 나는 그는 보호자라 하기엔 지나치게 어리진 않았지만, 또 지나치게 어른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형제자매나 친척 같은 존재였다.
하람이 선명히 기억하는 지후의 모습 중 하나는 항상 딱 달라붙는 검은 나시티에 팬티 차림으로 병이든, 캔이든 그의 앞에서 특가 상품으로 내놓은 싸구려 맥주 캔을 기울이며 마시고 있었다는 것이며, 하람이 있든 말든 신경 안 쓰고 그의 코앞에서 담배 연기를 뻐금거리고 있던 모습이었다. 전형적인 ‘허슬턴 가족’이기 짝이 없는 모습. 담배를 문 그는 지포라이터를 버릇처럼 딸각이며, 어딘가 권태로운 표정을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다. 녹색 눈동자에는 지루함이 가득했다. 그마저도 하람이 오면 호탕한 웃음과 함께 거두고는 했지만.
“이게 누구셔, 우리 꼬맹이, 오늘은 뭘 참견하러 오셨나, 앙?”
지후는 항상 그렇게 말하며 하람의 검은 고수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려 놓고는 했다. 담배 냄새와 알콜 냄새가 뒤섞인 친숙한 냄새를 맡으며, 하람은 지후의 거친 손길을 달게 받아들이곤 했다.
“지후, 그거 맛있어?”
하람은 종종 지후가 피우는 담배나 술에 관심을 보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지후는 아서라, 라고 말리는 대신 오히려 한 입 마셔보라고 부추겼다. 어린아이에겐 지나치게 자극적인 매운 담배 연기에 기침하거나, 입으로 밀려 들어오는 알코올의 쓴맛에 인상을 찌푸리면 세상 재미있는 것을 본 것처럼 낄낄거렸다.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끄고, 새 담배를 꺼내 문 지후가 지포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며 하람에게 말했다.
“나이 더 먹고 오셔. 그땐 좀 맛있을지도 모른다?”
“몇 밤 더 자야 해?”
“글쎄다~?”
“열 밤?” (하람은 아직 10까지밖에 세지 못했다)
“그걸로 되겠냐?”
열 밤보다 훨씬 더다, 꼬맹아. 지후는 그렇게 말하며 하람의 얼굴에 잔뜩 들이마셨던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하람이 매워하며 쿨럭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지후의 연인, 헤시타가 보았더라면 분명 한소리 했을 일이었다.
“참, 헤스에겐 비밀이다. 걔가 너에게 이런 짓 한 거 알면 분명 날 들들 볶을 거야. 나 걔에게만큼은 혼나기 싫거든?”
지후가 하람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의미 없는 약속이었다. 어차피 권지후는 헤시타를 포함해 남이 있든 말건 하람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실 위인이었으니까. 그는 눈치 같은 건 안 보는 사람이었다.
“엿 같은 인생, 남의 눈치만 보면서 살기엔 너무 짧지~”
그는 항상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고는 했다. 아, 언제 뒤질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 하고 싶은 것도 누리고 싶은 것도 맘대로 누릴 수 없는데, 눈치만 보면서 살다가는 속 터져 죽을 거야. 이제나저제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밑바닥 인생이라면 푼돈 벌려고 남 눈치 보면서 설설 기는 것보단 그나마 덜 귀찮은 일을 하는 게, 성질머리대로 사는 게 낫다고 지후가 말했다. 지후가 일용직을 전전하면서 ‘땜빵’을 뛰는 동시에 프리랜서 언령사로 일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허슬턴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지후도 먹고 살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입이 하나 더 늘어났으니 부지런히 일해야 했다. 그는 일이 끝나면 죽상이 되어서 돌아와 으아아, 소리를 내며 옷을 대충 벗어 던지곤 그대로 마룻바닥에 쓰러져 있곤 했다. 일종의 ‘충전 타임’ 이라고 했다. 쓰러져 있는 지후에게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들기며 힘들지 않으냐는 하람의 질문에 그는 그제야 몸을 반쯤 일으키며 ‘어, 뒤지게 힘들다.’ 고 말했다. 뒤이어 그러니까 안마 좀 해줘라 꼬맹이. 파스도 붙여 줘. 하고 하람에게 태연자약하게 어깨를 내미는 것은 덤이었다. 하람은 그런 지후의 어깨에 고사리손으로 안마를 해 주기도 하고, 그 위에 파스를 붙여주기도 했다. 가끔은 파스 위에 사인펜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비록 어린애 고사리손으로는 면적이 작은 파스 위에 그림을 그리기엔 버겹다 보니, 조금 삐져나와서 지후의 맨살 위에도 그림이 그려진 꼴이 됐지만)
거울로 하람이 파스를 붙인 위치를 확인하던 지후가 파스 위와 자신의 살갗 위에 그어진 삐뚤빼뚤한 그림을 보면서 물었다.
“뭐냐 이거? …토끼?”
“땡.”
“쥐냐?”
“땡.”
“아, 잘 보니 꼬랑지가 없네 이거. 흠…햄스터?”
“땡!”
“아~ 어렵네 이거. 정답이 뭔데?”
“하람이!”
한 손에 사인펜을 든 하람이 히히 웃었다. 어른도 못 맞춘 ‘어려운 문제’를 냈다는 데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지후는 거울에 비추어진 하람이 그린 쥐새끼…아니 ‘하람이’와 히히 웃고 있는 하람을 번갈아 뜯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 난잡한 선으로 이루어진 집합체는 ‘하람이’로 보기에 어려웠다. 좋게 봐줘야 꼬랑지 없는 쥐…아니, 햄스터 정도겠지.
“쯧. 다음엔 좀 더 알아볼 수 있게 그려라.”
“몇 점이야~?”
“…15점.”
“와~!!”
바닥에서 조금 나은 점수를 받고도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는 하람을 지후는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15점이 좋냐?”
“10보다 다섯 개가 더 많잖아.”
“그래그래, 니가 좋으면 됐다.”
지후가 대꾸했다. 다음에는 저 10까지밖에 셀 줄 모르는 꼬맹이 녀석에게 20까지 세는 법을 가르쳐 줘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그리고는 테이프로 대충 깨진 액정을 붙인 휴대폰을 하람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손 조심하고, 기념으로 니 그림 사진 좀 찍어봐.”
“응.”
“잘 찍어라, 헤스에게 보낼 거야.”
“헤시타 형에게 보내 줄 거야? 내 그림?”
“어.”
하람은 헤실헤실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지후는 이 사진을 헤시타에게 보내 그의 고견을 물을 생각이었다. ‘자기야, 이게 대체 뭐로 보여?’라고. 아무리 헤시타라고 해도 저 우글우글하다 못해 자유분방한 선의 집합체를 ‘권하람’이라고 보기엔 어려울 것 같았다.
파스를 붙였어도 노동으로 지친 몸이 쑤셔왔다. 이럴 땐 술로 통증을 잊는 게 제일이었다. 술은 지후에게 있어 삶에 필수 불가결인 음료수며, 만병통치약이었다. 지후는 땅바닥에 놓여 있던 점퍼를 대충 걸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람에게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야 꼬맹이, 아이스크림 사러 가자.”
“구슬 아이스크림 사줘.”
“…아니, 그 아이스크림이라 부르기도 뭣한 걸 잘도 먹더라, 넌.”
말은 저렇게 해도, 언제나처럼 하람이 원하는 구슬 아이스크림을 한가득 사줄 지후였다. 제 안줏값에 드는 돈은 아까워서 늘 빈속으로 술을 마시면서도 하람에게 드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가 않다면서.
“아~일하는 거 힘들다. 힘들어 뒤지겠다 진짜. 다 때려치고 싶다~”
편의점 의자에 앉아 구슬 아이스크림을 세 통째 먹고 있는 하람을 보며, 안주도 없이 술을 들이켜던 지후가 불쑥 혼잣말했다. 혼잣말치고는 목소리가 너무 컸던 탓에, 하람은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지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람의 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지후는 씩 웃으며 멋쩍게 덧붙였다.
“어쭈, 사람 말을 엿들을 줄도 알고. 우리 꼬맹이도 약았구나?”
“아닌데. 지후가 소리 질러서 들린 건데.”
“야, 아무리 내 목소리가 컸다고 해도 그 정도까진 아니거든? 어서 먹다 만 거나 더 드셔. 다 녹아서 없어졌다고 울지나 말고.”
아이스크림이 녹아 없어진대도 지후 말처럼 울지는 않을 거지만, 그래도 아이스크림이 없어지는 건 싫었다. 지후의 말에 하람은 다시 아이스크림으로 눈을 돌리곤 부지런히 떠먹었다. 아이스크림을 해치우는 데 집중한 하람의 검은 고수머리를 보며 지후가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혼잣말이니까, 넌 그냥 아이스크림이나 먹고 있어.”
지후가 말하며 새 술 한 캔을 따고는 죽 들이켰다.
“일은 힘들어도 익숙해. 어릴 때부터 일했으니까.”
지후는 항상 취기가 오르면 하람 앞에서 어린아이가 이해하기도 어려운 일 이야기, 혹은 자기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고는 했다. 하소연인 동시에, 들어줬으면 좋겠지만 들어주지 않아도 그만인, 그렇지만 누군가 상대가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은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지후의 이야기는, 특히 제 이야기일 경우는 항상 같았다. 옛날이야기였다. 조실부모한 그를 조부모가 데려다 키웠지만, 그 조부모마저도 지후가 제 몫을 좀 해낼 만할 열몇 살, 중학생이었던 어느 날 공화에 휘말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가족 중 지후만이 그 공화에서 살아남았다고 했다. 지후는 자기가 언령사로써의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고 했다. 그 이후론… 흔한 허슬턴 사람들처럼 살기 위해서, 학교에 다니는 틈틈이 부지런히 일했다고 했다. 생각 같아서는 학교도 때려치우고 싶었지만("학교가 돈 주는 것도 아니잖아~"), 조부모의 오랜 염원이었기 때문에 고등학교까지는 참고 나왔다고 했다.
“내가 효도하기도 전에 가셨다니까. 뭐가 그리 급하다고.”
지후는 그렇게 한참을 토해내듯 혼잣말하다가도 이내 아차, 하고 어린애 앞에서 내가 또 못할 소리를 했네, 하면서 하람을 꽉 끌어안거나,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어뜨려 놓곤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지후는 하람의 검은 고수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이 작은 머리통에 든 기억도 손짓과 함께 헝클어뜨릴 기세였다.
“…하 또 취해서 실언했네. 꼬맹아, 내가 한 말, 싹닥 잊어버려.”
하람은 지후가 주문처럼 손길 한 번에 ‘잊어버려! 잊어버려!’를 무슨 주문이나 되는 양 외치며 제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놓거나 말거나, 한 손에 플라스틱 수저를 꼭 든 채 지후의 거친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었다. 지후가 손을 떼자마자, 하람은 기다렸다는 듯 봉투 안에서 부스럭거리며 뜯지 않은 아이스크림 통을 꺼냈다. 그리고는 지후의 코앞에 불쑥 들이밀었다.
“까줘.”
“어.”
하람은 지후가 무슨 말을 늘어놓든, 거칠게 제 머리를 쓰다듬든, 헝클어놓든 전혀 상관없었다. 아직 지후가 늘어놓는 말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기도 했지만, 하람은 오히려 지후가 저렇게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할 때마다 내심 좋았다. 평소에는 아무리 지후라고 해도 많아야 두세 개밖에 못 먹게 하는 아이스크림을 이때만큼은 실컷 먹을 수 있었으니까. 아이스크림을 맨날 이렇게 먹을 수 있다면, 지후가 매일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놓아도 싫지 않을 것 같았다.
“받아라, 꼬맹이. 근데 이게 그렇게 좋냐? 뭔 맛이길래? 나 한 입만.”
그러니까 한 입 정도는 관대하게 양보해 줄 수 있었다. 비록 지후의 ‘한 입’이 하람의 아이스크림 절반에 해당하는 양이라고 해도.
이제는 어른이 된 하람이 생각해 봐도 권지후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변덕스러웠고, 제멋대로였다. 어찌 보면 저만 생각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 제 사람들에게는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악의 없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잘도 내뱉으면서도, 누군가가 지적하거나 상처 입었다는 기색을 보이면 반성의 기색은 없을지언정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고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야무진 것 같으면서도 이상한 데서는 생활력이 없고 허술했다. 제게 맡겨진 일은 야무지고 깔끔하게 해내면서도, 정작 집 꼬라지는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헤시타에게 한 소리 들을 때마다 지후는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처럼 ‘자기야, 집안일은 돈이 안 되잖아. 아니, 나도 청소가 중요한 건 아는데~ 그 뭐냐, 위생? 그냥 벌레 안 꼬이게만 잘 치우면 되는 거 아닌가~?’ 등으로 포장해 말하지만 결국은 ‘그러니까 청소 안 할래’라는 말들을 넉살 좋게 청산유수처럼 늘어놓고는 했다. 그도 안 되면 하람이 빤히 쳐다보는 앞에서 헤시타에게 입을 맞추려는 행동으로 무마하려 들었지만) 통장 잔고를 보면서 아, 아껴야 하는데, 저금해야 하는데, 하람이 대학은 못 보내더라도 울 할매 할배처럼 고등학교까진 보내야 하는데, 하며 자못 어른스럽고 현실적인 고민을 하며 한숨 쉬다가도 이내 생각하기도 짜증 나거나 귀찮다는 듯,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한 마디와 함께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의 일은 고민하기도 귀찮다면서 관두곤 했다. 제 옷은 다 떨어진 청바지에 학생 때 입었던 옷들을 돌려가며 입으면서도, 동생인 하람에게는 멀끔해 보이는 새 옷을 잘도 사 입혔다. 저는 귀찮다며, 돈 아껴야 한다며 유통기한이 임박해 떨이로 팔고 있는 산화된 기름 냄새가 나는 컵라면을 몇 상자씩 사다가 쟁여놓고 먹으면서도, 하람에게는 비싸고 맛있는 걸 곧잘 사 먹였다. (그렇게나 자기가 먹고 걸치는 건 그렇게나 아끼면서도, 술값과 담뱃값은 절대로 제하지 않았다. 끼니는 적당히 때워도 안 죽지만, 술과 담배는 없으면 말라 죽는다, 삶의 필수품이라는 게 지후의 논리였다) 제 성을 붙여주고 동생 삼을 정도로 하람을 애지중지하고 예뻐하면서도, 어린아이 앞에서는 하지 않아도 될 행동이나 소리는 잘도 했다. 어른으로선 철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귀찮다며 다 던져버리고 나 몰라라 도망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귀찮고, 하기 싫다는 변명인지 이유인지 모를 말을 앞세워 출퇴근이 일정한 직업을 찾진 않았지만, 일용직 자리가 뜨는 대로 일용직을 전전했고, 프리랜서로서 꾸준히 물어온 일로 연명하는 사람이었다. 귀찮고 번거로운 건 하기 싫어하고, 하고 싶은 거만 골라 하려고 하고 툭하면 요령 피우는 한량 같은 인간 같으면서도 성실했다. 허구한 날 ‘하기 싫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투덜거렸지만, 그러면서도 한숨을 내뱉고는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냐’며 일어나 투덜거리면서도 일을 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다. 툭하면 귀찮은 일에서 기회만 되면 내뺄 생각을 하면서도, 제가 맡은 일에는 이유가 뭐가 됐든 책임은 다했다. 얼핏 보면 제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어 하고, 얼핏 보면 족쇄가 필요 없어 보이는 사람, 책임감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였지만, 언제나 자기가 책임질 만한 가정을 꾸려서 살기를 원했다. 정말 총체적으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 로바타이프의 스테레오타입에 가둔다 치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백 퍼센트 스베차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오히려 정 다른 게 나오면 더 이상했을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지후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그는 적어도 하람에게 좋은 언니였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허나 그랬던 지후도 하람이 자라면서, 또 지후 자신도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던 모양이다. 그중 제일 큰 것은 열여덟 살 때부터 스물여덟 살까지, 십 년 동안 연인으로 지냈던 헤시타와의 결별이었다. 그 결별을 통해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자신의 ‘자유로웠던’ 삶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람이 열두 살인가 되던 어느 날, 지후는 하람에게 ‘좀 더 안정적인 직장’을 찾겠다고 말했다. 지후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가 어딘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이 누님도 이젠 어른이 되어야지.”
지후의 파격적인 결심을 들은 하람은 적잖이 놀랐다. 그 권지후가? 하람이 십 년 가량 봐온 권지후란 사람은 저런 일을 저지를 위인이 아니었다. 사람이 갑자기 철들긴 어렵다던데. 하람은 눈을 크게 떴다. 뜰 수 있는 한 최대로.
“지후…아니 언니, 제정신이야~?”
“…이게 진짜? 이 누님은 옛날부터 완~전 제정신이었단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하람의 말에 지후가 푸핫, 하고 웃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비 물었다. 그리고 예의 지포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 짓거리도 좀 더 일찍 끝냈어야 했어. 그랬다면, 어쩌면 헤스도….”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지후가 말했다.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내 그 목소리는 털어낸 담뱃재와 함께 특유의 명랑함으로 바뀌었다.
“솔~직히 내 얼치기 같은 실력으로 헤드헌팅 되기엔 무리일 것 같고, 씁, 뭐 한량처럼 내 좆대로 살던 지난날을 후회해봤자 소용 없으니, 뭐가 됐든 정석으로 밀어붙여야지.”
“지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적당히 입 터는 건 내 특기니까. 어떻게든 거들먹거리는 면접관 나으리들을 구워삶아야지.”
“진~짜 괜찮아?”
“…….”
지후는 잠깐 말을 멈추곤, 손끝에서 타들어 가는 담배를 잠시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진~짜 안 괜찮아. 진짜로, 완전, 하기 싫어. 근데 말이지….”
지후가 담배를 입에 가져다 대고는, 그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담배 연기를 한숨과 함께 깊게 내쉬었다. 그가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괜찮아도, 하기 싫어도 진즉 해야 했어.”
“…?”
멍한 얼굴을 하는 하람을 보며 지후는 픽 웃었다.
“너도 언젠가 이해하게 될 거다, 꼬맹이. 평생 모르면 더 좋겠지만―”
지포 라이터를 딸각이며 지후가 말했다. 딸각, 딸각, 딸각.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지포 라이터를 딸각이는 것은 지후의 오랜 버릇이었다.
“―아니다, 몰랐으면 좋겠네.”
딸각, 딸각, 딸각.
다시 현재, 그답지 않게 지포라이터를 딸각이며 옛날 생각에 빠졌다가 현실을 자각한 하람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공기 중에서 흩어져 사라지는 담배 연기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유령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람은 사후세계나 유령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유령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화가 보여준 허상, 허깨비 그 이상도 아니었다. 별것을 다 보여준다는 공화도 하람에게 지후의 모습만큼은 보여주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도맡아 하던 자칭 프리랜서 해결사 시절에도, KS에 입사한 지 일 년 차 되는 지금도. 이유는 확실했다. 하람이 지후의 ‘죽음’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진즉 깨우쳤기 때문에.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지독히도 잘 알고 있으므로.
―모를 수가 없지.
문득 자신이 KS에 입사한 걸 안다면 지후는 어떻게 생각하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엄청난 우연의 일치지만, 지후가 그 사고에 휘말리지만 않았더라면, 하람과 비슷한 나이대에 KS에 입사했을 터였다.
권지후는 하람이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KS 입사가 확정되고 첫 출근 일자를 받아둔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후가 휘말린 사고는 허슬턴 사람들에게는 ‘불운한 사고’도 아닌, ‘흔한 사고’ 중 하나로 치부되는 일이었다. 그날 허슬턴 외곽 어딘가에서 공화가 발생했고, 허슬턴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공화 현상이 그렇듯 KS도 민간업체도 이 공화를 최우선으로 꺾을 무언가로 여기지 않았다. 공화 주변에서 거리를 두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거기에 권지후가 뛰어들었다. 목격한 사람들 말로는 그는 굉장히 다급해 보였다고 했다. 거기에 꼭 들어가야만 한다는 듯이.
모든 것이 끝나 있었을 땐 이미 늦었다. 이번에는 ‘운이 좋게도’ 공화를 수습하러 온 업체가 있었다. KS인지, 민간업체인지는 몰랐다. 그런 건 애초에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가 처리했든, 얼마나 걸렸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대개는 내버려 두는 허슬턴의 ‘공화가 꺾였다’라는 것이 중요했다. 이번 공화 사건은 항상 그렇듯이, 뉴스에도 나오지 않는 흔한 사고 중 하나로 마무리됐다. 그 사고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마도 얼마 없을 것이다.
사고가 벌어졌던 장소는 공화를 꺾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그 사고가 벌어졌던 것들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지후의 죽음이 그 모든 것들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람은 지금 그곳, 15년 전 자신의 가족을 잃은 공화 사건이 벌어졌던 바로 그 장소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잠깐 바람이라도 쐴 생각으로 사무실을 나왔는데, 나온 김에 집에서 여벌의 옷을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허슬턴으로 향했다. 허슬턴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집 쪽 방향으로 향하려던 하람의 머릿속에 불현듯 ‘그 장소’가 떠올랐다. 그곳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그렇게 근처에 세워져 있던 오토바이를 ‘주워서’ 올라타고 목적지를 튼 끝에 도착한 곳이 이 장소였다.
이번뿐만이 아니라, 하람은 15년 전 그날 이후로도 가끔 사고가 벌어졌던 장소를 들르곤 했었다. 딱히 기간이 정해져 있진 않고, 불현듯 생각날 때마다였지만. 혹시라도 지후를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는 아니었다. 지후가 죽었다는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영영 가 버렸다는 사실을 하람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지.
비록 지후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왠지 이 일만큼은, 마지막 헤어짐만 기억해야 할 것 같았다. 설령 지후가 하람이 자신의 마지막을 기억하길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하람만큼은.
공화가 맺어주었던 두 사람의 인연은, 공화가 앗아 갔다. 원래부터 가질 수 없었던, 원래부터 너희 것이, 너희가 누려야 할 종류의 행복이 아니었으니 다시 돌려받아야겠다고 하는 것처럼.
길면 길고, 찰나면 찰나인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처럼.
“아.”
하람은 문득 졸린 눈을 크게 떴다. 잊어버렸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참, 서류.”
내일까지 끝내야 할 서류 작업이 있었다. (결코 서류 작업을 내팽개치고 도망갈 생각은 아니었다! 잊어버렸을 뿐이다, 아마도!) 지금부터 여기서 아무 오토바이나 가져다 최대로 밟아 돌아가면 얼마나 걸릴까. 하람은 머릿속으로 허슬턴에서 KS 본사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려다가 생각하기를 멈췄다. 어쨌든 확실한 건, 지금부터 밟아야 했다. 그래야만 제때 작업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하람은 구석에 넘어져 있던 오토바이를 일으키고는, 시동을 걸었다. 여벌의 옷을 가져와야겠다는 당초의 목적은 까맣게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
-언니, 날 구한 걸 후회하지 않아?
***
“야, 하람아, 권하람.”
어느 날, 술에 취해 늘어져 있던 지후가 하람의 이름을 불렀다. 아까까지만 해도 술에 취해 꼬인 혓바닥으로 혼잣말하더니만, 지금 하람을 부르는 목소리는 혓바닥에 걸려 나오는 것 없이 매끄럽고 선명했다. 본인이 직접 이름을 지어 줘놓고도 거진 꼬맹이라 불렀던 지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람은 바짝 긴장하고는 했다. (그리고 지후가 이름, 특히 풀네임을 부를 때, 그 두 개를 동시에 부를 때에는 대개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지후가 하람의 얼굴을 흘낏 보더니 푸핫, 하고 웃었다.
“표정 봐라. 풀어 임마. 혼내려는 거 아니거든~? 나에게 뭐 찔리는 거 있냐? 어디 나 몰래 야한 잡지, 아니 야한 만화라도 숨겨 놨어? 이 코딱지만 한 집 어디에 잘도 숨겨 놨대? 일로 가져와 봐라. 나도 좀 보게.”
“없어서 아쉽게 됐네~”
“아, 없어? 진짜로? 왜 없어? 아깝네, 그거~ 아니 근데 왜 없어? 죽을래?”
“으엑, 나 아직 죽긴 싫은데~”
“아, 됐고 아무튼. 일로 와봐봐.”
지후가 하람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의 지후는 백 퍼센트 ‘그 행동’을 할 것이 분명했다. 하람은 으, 하면서도 지후의 곁으로 다가갔다. 빙고, 지후는 술에 취할 때마다 으레 하는 ‘그 행동’을 했다. 하람을 바짝 끌어안고, 머리를 엄청나게 헝클어놓는 짓.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인 숨이 훅 끼쳐 왔다. 한참 하람의 머리를 뒤집어 놓던 지후가 헝클어뜨리던 손을 멈추고는, 하람을 꽉 끌어안은 채 하람의 고수머리에 얼굴을 묻고는 말했다.
“나는 후회할 짓도 많이 하고, 남들이 보기엔 글러 처먹은 어른일진 몰라도―”
평소와는 다른 나지막하고 진지한 목소리여서, 하람은 딴지를 걸려던 목소리를 삼켰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지후가 이어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하람이 널 구하고, 가족으로 삼은 걸 한순간도 후회한 적 없었어.”
지후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하람은 자신을 안은 팔에 힘이 더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지후가 말을 이었다.
“나는 항상 원했거든, 가족을.”
평소처럼 버석한 목소리인데도, 그 목소리에 왠지 물기가 어려 있는 것 같았다.
“널 구한 건 내 인생 최고로 잘한 일이야.”
지후가 덧붙였다.
“내 인생에 찾아와줘서, 내 동생이, 내 가족이 되어줘서 고마워.”
***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익숙한 불꽃이 눈앞에 일렁인다. 이것은 항상 보던 지포 라이터의 불빛이다. 귓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라면 할 수 있어.’
다시 살펴보니 그것은 라이터의 불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불꽃은―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그 불꽃은 분명히 언니의 눈동자 색깔과도 같은 녹색―아니, 아니다. 그 불꽃의 빛깔은 하람의 눈동자 빛깔보다도 더 밝은 노란색이었다.
‘나’의 불꽃이다.
“…잘했어. 하람아.”
그리고 그 어둠 속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 이제는 희미하지만,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다.
***
“―람.”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가까이에서인가?
“―일어나. 딱 10분 후에 깨워달라고 했잖아.”
누군가가 자신을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에 하람은 눈을 떴다. 저도 모르게 잠든 모양이었다. 입가의 침 자국을 슥 문질러 닦았다. 고개를 몇 번 가로젓고 졸린 눈을 비비며 깨운 이를 살펴보니 눈앞에 이산 페레즈의 얼굴이 보였다.
KS 본사까지 어찌어찌 도착한 하람은 곧바로 자리로 복귀하는 대신 잠깐 눈을 붙일 깜냥으로 휴게실 구석에 누웠는데, 그대로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 후 휴게실에서 잠든 하람을 발견한 이산이 여느 때처럼 그를 깨웠을 때, 하람은 잠결에 이산에게 10분만 더 잘 테니 10분 후에 다시 깨워달라고 하고 (“꼭 깨워줘야 해, 서류 써야 할 게 있단 말이야~”하고 거듭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대로 다시 잠들었었는데, 생각보다 깊이 잠들었었던 모양이다. 아직도 잠에 취해 몽롱한 얼굴로 하람은 한껏 기지개를 켰다. 기지개를 켜는 한편 곁눈질하니,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살피는 이산이 보였다. 하람은 장난스럽게 이산에게 말을 붙였다.
“안 깨어날까 봐 걱정했어~?”
“응. 서류 작업해야 할 게 있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 조금만 하면 끝날지도, 아마도~?”
그 '조금'이 '조금'이 아니라, 아무래도 제시카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았지만 말이다. 하람은 문득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을 보니 지금쯤이면 제시카가 자리에 있을지도 몰랐다. 제시카의 도움을 받으면 남은 서류 작업쯤은 금세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깨워줘서 고마워~”
“아냐.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응, 응. 괜찮아.”
괜찮다고 말한 것과 달리, 하람은 누가 봐도 잠에 취한 모습으로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산이 그런 하람에게 염려하는 눈빛을 보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응, 응. 완~전 괜찮아. 가는 길에 화장실에 들러서 물 좀 끼얹지 뭐~”
하람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이제는 진짜로, 무슨 일이 있어도 잠에서 깨어나 서류라는 현실과 맞설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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