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람 | 데이트를 한 하루
※로그 시점: <암운에 잠겨가는 하루> 이후
그 날 이후로 하람은 도끼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드베르토의 권유로 당분간은 불안정한 기술 대신 장기인 체술을 살리는 쪽에 힘을 더 싣기로 했다. 아예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는 있는 것, 잘하는 것을 살리는 게 더 나았으니까. 도끼는 체술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언령의 훈련을 겸해 하람이 택한 무기기도 했다. 절대로 콧물 같은 녀석…아니, 슬라임 같은 녀석들을 상대할 때를 대비해서가 아니다. 아마도! 덕분에 훈련실에서 무기를 휘두르는 시간이 더 늘었다. 차라리 잘됐다고, 무기를 휘두르며 하람은 생각했다. 못 쓰는 것을 신경 쓸 필요는 없으니까. 대충 위기를 기회로 삼아 보자, 뭐 그런 거로 생각하기로 했다. 비록 위안은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도끼를 휘두르는 동안 머리는 상쾌해지긴 했다.
이곳저곳에서 동시다발적인 공화가 터진 덕에, 결계술사 일은 덕분에 여전히 호황이었다. 다들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하람에겐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불발률이 높아진 스킬이니 뭐니, 그런 거에 대해선 잊을 수 있었으니까. 불발률이 부쩍 높아진 스킬 때문에 어울리지도 않게 고민하거나 울적해 할 겨를이 없었다.
하람은 프로스페리티에 발생한 C급 공화를 꺾는 업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늘은 함께 돌아가는 일행 없이 저 혼자였다. 하람의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A팀 일원 중 하나가 하람을 배려해 먼저 보내 준 탓이었다.
“뒷처리랑 보고서는 내가 쓸게, 이만 돌아가.”
“진짜요~? 나 그럼 정말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나중 가서 뭐라 하기 없기에요~?”
“누가 아무것도 하지 말랬어? 권하람 사원. 네게 막중한 임무를 내리겠어.”
그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좀 이르지만, 사무실을 장식할 크리스마스 장식을 알아보도록.”
“아하, 그건 내가 전문이죠~”
“좋았어. 최대한 화려하고 귀엽고, 누가 봐도 크리스마스다! 싶은 거로 부탁해.”
“맡겨만 주세요~”
“팀장님 퇴사하시기 전에 송별회 겸해서 깜짝 파티는 조촐하게라도 해 드려야지, 안 그래?”
“완전 못생긴 스웨터도 입혀 드리자고요~”
“그건 이미 신속하게 알아봤지. 배송 중이야.”
하람이 씩 웃었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하람이 ‘노잼인 A팀 사무실’에 좀 더 화려하게 장식을 붙인다고 한바탕 난리를 피웠던 걸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하람을 위한 보이지 않는 나름의 배려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하람은 상관없었다. 오히려 좋았다. 일단 보고서를 안 쓸 수 있으니까.
하람은 ‘막중한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 프로스페리티의 상점가에 들렀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라 그런지, 화려한 장식으로 장식된 상점가는 성황이었다. 하람은 쇼윈도에 나붙은 크리스마스 디피나,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구경했다. 예전 같으면 먹고 사는 데 바빠서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을 무언가였다. 새삼 신기했다. 예전 같으면 전혀 의미가 없었을 무언가였는데, KS에 입사한 요 일 년 동안 삶이 송두리째 뒤바뀐 것 같았다. KS에 입사한 이후, 정확히는 A팀에 들어간 이후 그는 놀라울 정도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예전에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삶…
감히 누리기에도 과분한 삶.
하람의 곁에 다가온 누군가가 하람을 툭 치며 친근하게 말을 붙이는 바람에, 하람은 미혹에서 깨어났다.
“거기 귀염둥이, 시간 있나?”
“우왓.”
하람은 도낏자루를 손에 쥔 채 자신을 부른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훤칠한, 칼리스토 또래 정도로 보이는 사람이 하람을 보고 싱긋 웃어 보였다. 그는 군데군데 새치가 섞인 짙푸른 머리에 그라데이션 선글라스를 멋들어지게 쓰고 있었다. 선글라스 뒤로 얼핏 보이는 회색인지 제비꽃빛인지 모를 빛깔의 눈에는 특유의 명랑함이 깃들어 있었고, 전체적으로 유쾌하고 쾌활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좋게 말해서 유쾌하고 명랑하지, 나쁘게 말하면 존재 자체가 경박해 보이는 사람일까. 하람은 어깨에 도끼를 들쳐메고는, 자신에게 말을 건 상대를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싸인 받으러 왔어요~? 내 팬?”
“팬 비슷한 거라면 비슷한 거려나? 아무튼, 시간 있어 아가씨?”
“나, 무뢰배랑 데이트 약속한 기억은 없는데요~”
능청 부리는 하람의 말에 상대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반응엔 익숙한 사람인 것 같았다. 아니면 비슷한 부류든가. 상대가 되려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으며 하람에게 말했다.
“틀렸어, 아가씨. 굳이 따지면 헌팅이지?”
“우와~ 저질, 불한당, 무뢰한, 무뢰배.”
“그 단어 최근에 배웠냐?”
“어떻게 알았어요~?”
“자주 쓰길래. 짜식, 꽤 귀엽네?”
그가 씩 웃으며 하람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서 예쁜이, 나랑 데이트 할 시간 좀 내줄래?”
“에엑~ 언니는 내 취향 아닌데.”
“아, 시간 좀 내줘~ 아가씨랑 단둘이 데이트하고 싶어서 얼마나 틈을 봤는데, 내가.”
아가씨 옆에 엄마 새들이 단단히 붙어 있어서 도무지 틈을 못 봤다며 너스레를 떠는 건 덤이었다. 상대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러니까 귀염둥이, 시간 좀 내줘, 응? 내 고생을 봐서라도~”
“우와, 불한당 이상이네. 스토커세요~~??”
“와, 진짜 너무하네~ 스토커라니. 그런데 틀린 말 없긴 하네. 그래도? 데이트는 해주라.”
상대의 말에 하람이 도낏자루를 쥔 손을 꽉 쥐며 말했다.
“용건만 말해요~ 자꾸 그러면 나, 기분 안 좋아질지도 몰라. 요즘 기분 좀 별로거든?”
“튕기기는, 알았어, 알았어.”
나도 그 도끼에 반갈죽 되긴 싫으니까. 그렇게 말한 이가 말을 이었다.
“나, 아가씨에게 볼일이 있거든.”
“우웩~ 스토커라는 거 취소. 오빠 변태세요~?”
“하, 진짜…. 쉽지 않네, 이 아가씨.”
내 잘생김이 안 먹힌다고? 상대가 골 때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는 친근하게 하람을 끌어당겼다. 마치 에스코트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자자, 따라와 달링. 내가 끝내주는 데이트 장소를 알거든?”
“그쪽이 사요~”
“데이트의 기본이지, 그건. 그래, 우리 아가씨, 이름이?”
하람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도낏자루를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가는 것은 덤이었다.
“변태, 저질, 스토커면서 그것도 모르세요~?”
“…미안, 사실 우리 귀염둥이 이름도 알고 있어. 아씨, 이따위 말 하니까 진짜 수상해 보이네 아 진짜, 내 이미지 망했어 아. 레이레이 그 새끼 나에게 이런 일을 시키다니 XX 돌아가면 죽여버릴 거야….”
흑흑, 내가 얼마나 순애보에 로맨티시스트인데, 변태 저질 스토커 같은 불미스러운 오해 받을 짓이나 시키다니, 하 그러게 레이레이 그 자식이랑 가위바위보로 승부하자고 하는 게 아니었어, 하고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상대를 하람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혼잣말하기를 좋아하는 걸 보니, ‘레미 오빠’, 레미 코스타랑 만만찮게 죽이 잘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른 점이 있다면 이쪽의 말이 레미보다는 훨씬 알아듣기 쉽다는 것일까. 그리고 빙빙 돌면서 피루엣 어쩌고도 하지 않는다는 점도. (하람은 그 점에선 레미가 더 재미있다고 평가했다. 이 변태는 돌지도 않고, 혼잣말만 하고, 말은 알아듣기 편했지만 재미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변태였다!) 이내 혼잣말과 구시렁거리기를 멈춘 이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하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블레이크 아이젠버그.”
“길어.”
하람이 말했다.
“그냥 변태라고 할게요~ 간단하고 좋네.”
“아, 진짜! 너무 길면 걍 BK(비케이), 아니 이것도 아가씨에겐 길겠구나? 그냥 B(비)라고 불러줘. 변태니 저질이니 스토커라고 부르는 건 그만둬주라, 제발. 부탁이야 허니.”
나 눈에 띄기 싫어. 그가 하람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람은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귀찮지만, 공짜 밥 사준다니 어울려 줄게요~”
“그거 고맙네. 아가씨, 데이트해줘서 진짜 고마워.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하람은 대놓고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변태…아니, 블레이크가 선글라스 너머로 하람에게 윙크를 보내며 말했다.
“참, 스위티. 둘만의 데이트 방해받기 싫으니까, 아가씨네 엄마새들에게 좀 늦어질 거라고 메시지 보내두는 거 잊지 말기! 특히 아가씨네 대리님이나 팀장님에게 걸리면, 좀 많이 성가셔질 것 같거든? 응?”
“으헥. 진짜 귀찮게 하네요~”
“대신 진짜 끝장나는 데이트 코스를, 신천지를 보여줄게, 허니! 나, 프로스페리티라면 완전 빠삭하거든? 유잼 보장, 꿀잼 보장.”
하람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A팀 단톡방에 ‘웬 저질 변태가 갑자기 날 붙잡고 다짜고짜 데이트 신청을 했다. 무시하려고 했는데 애걸복걸하면서 징징대는 바람에 불쌍해서 어울려 주느라 늦어질 거 같다’라는 요지의 메시지를 보ㄴ―
“아, 허니! 솔직한 건 매력이지만, 사실 그대로 쓰면 안 되지!! 이 아가씨 진짜 큰일 낼 아가씨네??”
“남의 휴대폰이나 엿보고, 진짜 저질이네요~”
“그냥 일 있어서 좀 늦어질 거 같다고 보내 주라, 응? 응? 제발. 이 블레이크 아이젠버그, 아가씨께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비싼 밥 얻어먹을 거예요~”
“아, 딜, 딜.”
―간단하게 복귀가 늦어질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하람이 메시지를 보내는 걸 지켜보고 있던 블레이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그럼 가보실까 아가씨! 끝내주게 모시겠습니다~!”
이 경박한 변태…아니, 블레이크가 프로스페리티에 빠삭하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블레이크는 연신 시답잖은 소리를 하면서 ‘데이트’를 빙자해 하람에게 밥을 사주고, 프로스페리티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녔으니까. 블레이크는 하람의 과제인 ‘크리스마스 장식’ 이야기를 듣더니 이것저것 추천해 주는 것도 모자라 골라 주기까지 했고, 어디 빵집이, 어디 과자가 맛있다더라~ 같은 이야기도 했으니까. (크리스마스 시즌 한정으로 나오는 쿠키 세트가 맛있는 곳을 알게 된 건 나름 큰 수확이었다! 하람은 이것도 변태…아니, 블레이크에게 뜯어냈다) 블레이크가 마지막으로 하람을 데려온 곳은 익숙한 장소였다. 웨스트엔드, 78번가 5번지. 제시카 그리고 드베르토와 함께 프로젝트 리프레임 관련으로 왔었던 그곳이었다. 하람을 에스코트한 블레이크가 시원스럽게 웃으며 눈을 찡긋해 보였다.
“여기가 마지막 코스. 우리 아가씨에게도 익숙한 곳이지?”
“에엑, 밥 사준다더니, 술까지 사주는 거예요~?”
“아가씨에겐 오히려 개이득 아냐? 그때 많이 못 마셨잖아?”
“으헥. 거기까지 알아요? 진짜 수상한 변태시네~”
“아, 진짜…. 그놈의 변태라는 소리 안 할 수 없어, 달링? 제발. 난 젠틀하다고.”
“젠틀이라고요~~~?? 데이트랍시고 술 먹이는 놈들이 제일 수상하다던데~ 우리 팀 <안전 지침서>에도 적혀 있다고요~”
당연하지만 개뻥이고 개구라였다. 사실 그딴 수칙 같은 건 <안전 지침서> 따위엔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하람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말한 탓에, 블레이크는 진짜로 믿어버린 듯했다. 그가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을 짓다 못해, 제 이마를 장갑 낀 손으로 짚었다.
“하, 진짜…. 아니 됐다. 그냥 따라와.”
“그래도 사준다면 사양 않고 마실 거예요~”
“이 아가씨 진짜 골 때리는 아가씨네? 야, 마실 거면서 왜 그딴 소릴 하는데?”
“흐음~ 야? 야라고요~? 데이트하는 싸가지가 안 되어있어. 나 갈래. 제시 언니랑 팀장님에게 전~부 다 이를 거예요. 아니, 이 자리에서 불러줘요? 그게 빠르겠네~”
하람이 으름장을 놓았다. 어떤 무뢰한, 무뢰배, 변태 스토커가 다짜고짜 날 오랫동안 봐왔다면서 갑자기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도 모자라 내 이름도 직업도 알고 있다고 하질 않나, 거절했더니 제발 데이트 좀 시켜달라 애걸복걸해서 불쌍하고 가엾길래 마지못해 수락해줬더니, 이곳저곳 끌고 다닌 것도 부족해서 마지막 코스로 술집까지 데려왔다며…. 사실적시였지만 누가 들어도 수상해 보이는 코스였다. 블레이크는 비장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는 하람을 올려다보고는, 양손을 파리처럼 싹싹 비비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아가씨. 제가 실언했습니다. 제발 저랑 데이트 좀 해주세요. 제가 성급했습니다. 이 블레이크 아이젠버그, 우리 아가씨랑 데이트하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려서 그만.”
“예약하신 분이시죠?”
자칫하면 2막, 3막으로 이어질 뻔했던 블레이크의 파리인간 원맨쇼는 다행히 종업원의 등장으로 1막에서 중단될 수 있었다. 블레이크는 이 무대에 등장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세주라도 보는 눈빛으로 종업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넵!”
“예약하신 분 성함이?”
“아이젠버그입니다.”
블레이크가 자리에서 일어나 종업원에게 몇 마디 더 속삭이자, 종업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을 안내했다. 저번엔 올라가지 못했던 2층 계단 위에 위치한 어느 방으로 안내받았다. 척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기에 적당한 룸이었다.
“자, 아가씨. 여기 앉으시죠.”
그가 의자를 빼 하람에게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하람은 사양하지 않고 냉큼 자리에 앉았다.
“자, 허니, 내 정체는… 여기까지 왔으면 눈치챘지? 난 전유술사야.”
“켁.”
“더 정확히는 <아키텍트>의 일원 중 하나고.”
“우와, 뻥이 심하시네~”
“하, 이 말괄량이 아가씨 좀 봐라. 진짜…증거 보여줘?”
블레이크가 한숨을 푹푹 쉬면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작은 톱니바퀴 모양의 목걸이로, 하람도 잘 알고 있는 <아키텍트>의 상징물이었다.
“원한다면 깨물어 봐도 좋고. 순금이 아니라 이는 나가겠지만. 아가씨 월급이면 진짜 금니 해 넣을 정도론 벌지?”
“<아키텍트>인지 뭔지도 꽤 가난한가 보네요~”
“하…. 우리에겐 가난보다 더 크고 중대한 문제가 있지, 허니.”
주문한 술이 나왔다. 병에 든 술이었다. 블레이크가 보란 듯이 하람의 눈앞에서 병을 뒤집어 보았다. 단단히 밀봉된 술이고, 어떠한 수작질도 없으니 안심하라는 제스처였다. 그가 솜씨 좋게 손가락 힘만 사용해 병을 땄다. 딱 띵 하고 병뚜껑이 부딪혀 나뒹구는 소리와 함께, 퐁 하고 청량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블레이크가 하람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아가씨에게 먼저 드리는 게 도리지만, 내가 먼저 마셔도 될까? 수상한 거 안 넣었다고 몸으로 직접 입증해볼 겸.”
“그러세요~”
“고마워, 스위티.”
그렇게 말한 블레이크가 자신 몫의 잔에 술을 따르고는, 하람의 잔에도 술을 따라 주었다. 잔을 들어 올린 블레이크가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이 한 잔은 여기 귀엽고 깜찍한 아가씨를 위해.”
술을 남김없이 비운 블레이크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5분 정도 지났을까, 그가 하람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봤지, 아가씨, 독도, 약도 아무것도 없어.”
“그럼 마실게요~”
“마셔, 마셔. 사양하지 말고.”
하람이 술을 들이켰다. 블레이크 역시도 씩 웃으며 제 잔을 채웠다.
“술 마시는 폼이 시원~시원한 걸 보니 제법 잘 마시겠어, 허니? 저번에는 별로 못 마셔서 좀 아쉬웠겠는데? 맛있는 거 많았거든~”
“뭐야, 오빠 여기 있었어요?”
“있었지, 있었어. 그래서 아가씨가 날 기억 못 해서 얼마나 서운했는 줄 알아?”
“그쪽이 개성이 없었나 보죠~”
“하긴, 나도 어디 가서 외모로는 안 꿀리는데, 아가씨 일행들이 나 따윈 쨉도 안 될 정도로 멋들어지긴 하더라~”
“꿈 깨세요. 그쪽은 제시 언니랑 팀장님 합쳐도 발톱의 때만큼도 안 돼요.”
“팔안굽이냐? 아니면 팀원들을 그만큼 좋아하는 건가? 없어지면 아쉽겠어?”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하람이 무어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변태 스토커, 라는 말이었다―) 블레이크가 씩 웃으며, 하람의 빈 잔에 재빨리 술을 채워주었다.
“이해해, 이해해. 나도 그러니까.”
몇 병의 술과 실없는 소리가 연거푸 오갔을까 (블레이크는 하람이 자신을 변태라고 부를 때마다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블레이크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 이제 우린 술친구나 다름없으니까, 이제 본론을 말할게.”
“네에, 네에~”
블레이크는 잠시 뜸을 들였다. 뭔가 말을 하려고 하다가, 양미간을 찌푸리다가를 반복하던 블레이크가 하, 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 이거 막상 말을 꺼내려니까 쫌 그렇네.”
“에, 설마, 초면에 프러포즈 막 그런 거 하시려고~? 신고할 거야. 팀장님 부를 거예요.”
“허?! 아냐, 이 아가씨야!”
“근데 왜 말을 못 해요~”
“씁 그게 말이야 스위티, 막상 말을 꺼내자니 되게 다단계니 사이비 같아서 말이지.”
“걱정 마요, 언니가 뭔 말을 해도 무뢰한, 불한당, 저질, 변태 같을 테니까~”
“그래, 고―호맙다.”
아씨, 진짜 뭘 어떻게 꺼내려 해도 존나 다 사이비 같잖아, 미치겠네. 중얼거리던 블레이크는 잠시 말을 꺼내기를 망설이는 듯했다. 으아아, 그가 머리를 한 번 싸쥐고 뒤얽더니, 이윽고 무어라도 결심한 듯, 비장한 얼굴로 하람에게 말했다.
“아가씨, 내 입에서 무슨 말 나와도 웃지 말기다.”
“안 웃을게요~”
“좋아, 그럼 하나 둘 셋.”
후우, 하고 심호흡을 내뱉은 블레이크가 입을 열었다. 자못 비장한 말투였다.
“달링, 우릴 좀 도와줘.”
“에엥~? 뭘요~? 범죄를요~?”
“아니, 세계를 구하는 일.”
정말 골 때리는 소리였다. 하람이 술을 빈 잔에 따르는 소리만 고요한 룸 안에 울려 퍼졌다. 블레이크가 한숨을 쉬면서 다시 머리를 헤집기 시작했다.
“아씨, 이렇게 말하니까 더 이상하네 하 근데 이렇게밖에 말을 못 하겠다 떠올릴 수 있는 멘트들 중에서도 이게 제일 덜 수상했다고 아 진짜 가오 떨어지네 아 어쩌라고 아아악 아 이거 데려다가 보여줄 수도 없고 아….”
또다시 원맨쇼 모드에 진입한 블레이크를 구경하며 술을 홀짝이던 하람이 한 마디 했다.
“변태 저질 스토커에 이어 또라이세요~?”
“그래, 못 믿겠지. 다짜고짜 세계를 구하라! 고 말하니까. 솔직히 이거 말하는 나도 개쪽팔려. 근데 말야, 허니?”
침울하게 말한 블레이크가 다시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곤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 진짜. 이 뒤에 이어질 멘트는 내가 생각해도 구라 그 자체, 또라이 사기꾼 새끼로밖에 안 들리는 멘트인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블레이크가 단단히 결심한 듯한 얼굴을 하고는 하람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들은 모두 사실이야.”
“와, 진짜 구라같네요~ 저질 변태 스토커 또라이 구라쟁이.”
“…스위티, 이거 말하는 내가 더 쪽팔리니까 제발 상처에 양념 더 치지 말아주라, 응?”
“불쌍해서 들어는 드릴게.”
“그래, 고―맙다.”
“빨리 말해요. 3초 줄게. 3…2…”
“카운트가 너무 빠르잖아, 예쁜아! 아, 잠깐 타임! 허니, 제발!”
이후, 저질 변태 스토커…가 아니고, 블레이크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은 하람이 듣기엔 ‘뜬구름 잡는 소리들’ 이었다. 왜 블레이크 본인도 말하기 ‘쪽팔린다’고 표현했는지 알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소리였으니까. KS니, 아키텍트니, 세계의 멸망이니 하는 것들. 현재 세계가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고, 특히 공(空)과의 접경지역에 해당하는 사일런트 필드와 더스키 림 보존지구에 심상치 않은 징후가 감지되고 있다는 소리였다. 공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고, 공화 발생 빈도가 높아져 통제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결계술 같은 기존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세계의 질서 자체가 붕괴하고 있기 때문에, 제아무리 결계술로 복구해봤자 붕괴되는 질서를 복구하는 꼴이라 결국 그 끝은 붕괴에 다를 수밖에 없다고, 그러기 때문에 그와 반대되는 가능성을 가진 전유술을 활용해 붕괴를 막아야 한다고.
“당장은 허튼소리로 들리겠지. 하지만 확실한 건, 막지 않으면 큰일 나. 아가씨, 허슬턴 출신이지?”
“아는 거 물어봤자 국물도 안 나와요 형~”
“그래, 만약 이걸 이대로 놔두면 아가씨네 고향도 큰 영향을 받을 거야. 콰광-하고. 허슬턴 뿐만이 아니라 경계지역과 가까운 곳이면 전부 다 콰광-! 이 될걸. 그러면 아주 난리법석이 날 거야.”
“…….”
그 모든 것을 들은 하람은 멍한 얼굴로 이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을 뿐이었다.
“이해 못 하겠어요~”
당연했다. KS니 아키텍트니, 세계의 존속이니, 멸망이니, 그들의 대의니 명분이니 하는 것들은 하람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건 ‘현재’가 아니었고, 아득한 미래였으니까. 언제나 그랬었다.
하지만.
“그렇겠지. 내가 말해도 개구라, 개뻥카, 사이비 같은데 아가씨는 어떻겠어? 하지만 믿어줘 허니, 사실이야.”
“어떻게 믿어요~?”
“안 그러면 내가 아가씨에게 이 핸섬한 얼굴을 까고, 숨겨도 될 본명까지 까발리는 것도 모자라 내 돈 쓰면서 술까지 사줬겠어?”
“그냥 저질 변태 스토커의 마지막 양심 그런 게 아니고요~?”
“하, 진짜… 그래, 다 제쳐두고 차라리 아가씨가 혹할 걸 던지는 게 낫겠네.”
블레이크가 하람을 바라보더니, 씩 웃어 보였다. 시원시원한 미소기도 했고, 경박해 보이기도 했다.
“아가씨, 요즘 고민 있지?”
“네에~?”
“요즘 아가씨 불꽃이 뭘 해도 뜨겁게 안 타올라서 걱정이라 알고 있거든?”
“…….”
블레이크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박자감 있게 두들겼다. 딱. 딱딱. 그가 하람의 눈빛을 살피더니 씩 웃었다. 빙고.
“맞구나? 걱정이 크겠어, 아가씨도.”
하람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거기까지 알고 있다니 보통 변태가 아니었다. 하람이 눈을 가늘게 뜨며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우와, 그건 극비 중 극비인데. 그걸 캐내다니 진짜 상상 이상의 변태네요~”
“그래, 아가씨 말대로 ‘우린’―”
“변ㅌ―”
“―스토커니까.”
블레이크가 하람의 말을 재빨리 막았다. 변태보다야 스토커로 자칭하는 게 훨씬 나았…
“우리라니~ 변태가 누나 하나 말고도 집단으로 있다고요~?”
오 망할, 시원하게 조졌군. 블레이크 아이젠버그는 권하람에게 이미 변태로 완벽하게 낙인찍혀 버린 게 분명했다. 허나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변태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이 자신 혼자만이 아닌 집단 단위로 찍힌 부분이랄까.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지.
블레이크는 얼굴을 확 펴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 그래, 차라리 변태 ‘집단’이 낫네. 그래그래, 음~ 좋았으. 나 혼자만 변태면 억울하지, 암!”
블레이크는 ‘집단’이라는 단어는 좀 만족스러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하람이 끝까지 저럴 걸 알아서 이젠 그냥 자포자기했든지, 둘 다일지도 몰랐고.
블레이크가 술병을 비우고 있는 하람을 향해서 씩 웃어 보였다.
“멀리 갈 거 없이, 간단하게는 아가씨가 떠안고 있는 고민 말이지, 그거 우리 변태 집단이 해결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어디까지 조사한 건지는 모르지만 저쪽도 주도면밀하게 조사한 모양이었다. 하람은 상대방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변태 집단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어요~?”
“그래도 아가씨, 조금 혹했지, 그치?”
“그렇긴 하네요~ 그치만 사기꾼일지 어떻게 알아.”
“으, 맞말. 이건 내가 아가씨에게 입증해 보여야겠네. 시간 돼, 스위티?”
“추가 비용 받을 거야.”
“알았어, 알았어. 뭐든 낼게, 달링.”
블레이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하람을 향해 유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따라와, 귀염둥이. 좋은 거 보여줄게.”
블레이크는 하람을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문득,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각이 전신을 훅 끼쳐왔다. 이 감각은… 공화였다. 대체 무슨 수작질을 하려고. 하람이 블레이크를 지긋이 바라보자, 블레이크가 하람에게 말했다. 손날을 들어 제 얼굴을 세로로 가르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내가 허튼짓하면, 아가씨 손에 들린 그 깜찍한 도끼로 날 반갈죽해도 좋아.”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이른 크리스마스 소원이라면 더더욱 들어드려야겠네요~”
“야무지네, 아가씨. 그러니까 내가 우리 스위티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블레이크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공의 환경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빛나는 별들이 사방천지에 가득했다. 하람은 눈을 크게 떴다.
“이 정도로 놀라기엔 모자라지, 예쁜이!”
블레이크가 손가락을 튕겼다. 주변 환경이 다시 한번 더 바뀌었다. 주변에 뜬 별들이 반짝이다가, 이내 나비 모양으로 변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빛의 나비는 그야말로 장관 그 자체였다. 멍하게 주변을 떠다니는 나비를 바라보는 하람을 향해 그가 유쾌하게 웃었다.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허니! 착한 아이에게 주는 선물!”
“전유술이에요~?”
“아~ 고작 이런 눈속임 정도로 놀라면 곤란한데~? 나는 우리 일당 중에서도 허접이야, 그냥 허접도 아니고 개허접.”
블레이크가 씩 웃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변태 집ㄷ…아니, <아키텍트>에는 나보다 더 개쩌는 변태들이 차고 넘쳤다고.”
“그~러니까 지금 <아키텍트>가 최강 변태 집단이라고 자랑하는 거예요~?”
“그래, 천하무적, 천하무쌍의 변태들이지.”
블레이크는 싱글벙글 웃으며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그래도 어때, 변태 집단치고는 꽤 능력 있지? 우릴 좀 믿어줄 수 있겠어, 달링? 그러니까, 적어도 아가씨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단 것만은.”
“어떻게요?”
“우리 최강 변태 집…아니, <아키텍트>와의 단체 미팅에 참여하는 거지, 허니.”
블레이크가 손가락을 튕겼다.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찬란한 오색 빛깔의 나비들이 많이 생겨났다. 오색 빛깔의 원석, 혹은 별조각들이 생겨나는 것은 덤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들은 빛이 아닌, 불꽃으로 이루어진 뭔가 같기도 했다.
“짠짜라짠. 12월 24일까지, 블랙버리 교도소 근처 폐건물로 오세요~ 그 이후엔 투 비 컨티뉴. 스포일러는 안 돼~! 난 스포 싫어하거든?”
“와~ 저질 변태에 스토커에 이어서 순 사기꾼 집단 아녜요~?”
“사기꾼이라니~ 우리 일 좀 도와달란 말씀! 아까도 말했지만 우린 아가씨 같은 능력 있는 결계술사가 필요해. 세계의 종말로부터 세상을 멋지게 구해내!…는 것까진 어렵더라도, 적어도 덮쳐올 종말을 막기 위해서.”
“용사 놀이할 거면 다른 사람 찾아봐요~ 나 그런 거 하기엔 다 컸어.”
“그래그래, 갑자기 이런 소리 하면 놀랄 만도 하지. 그러니까 생각해 봐 스위티. 하지만 말야.”
블레이크가 말했다. 자못 진지한 어조였다.
“아가씨의 고민 해결에 우리랑 손잡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건 사실이야.”
“…….”
“허니, 아까 말했지. 무너져가는 질서를 복구해봤자,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응, 그랬던 거 같아. 근데 그게 왜요~?”
“아가씨의 꺼져버린 불꽃도, ‘예전에 하던 대로’ 해봤자 소용없을 거야. 그건 이미 꺼져버린 거니까.”
“무슨 소리예요~?”
하람은 블레이크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블레이크는 하람의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바라보며 무언가 더 말하는 대신 씩 웃었다.
“그래, 아가씨도 저질 변태 스토커 그룹 소속 조무래기의 얘기는 더 듣기 싫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해산하자. 너무 오래 잡았네.”
블레이크가 손가락을 다시 튕겼다. 오색 불꽃 나비들이 하나하나 사라지고, 불꽃으로 이루어진 별들의 빛이 하나씩 꺼져갔다. 빛이 꺼짐과 동시에, 늦가을, 혹은 초겨울의 바람이 피부로 느껴졌다. 블레이크가 하람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공화의 부산물 같기도 한데 조금 달랐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원석 같은 것이었다. 원석은 아까 하람이 보았던 나비나 별들의 빛과도 같은 빛깔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전유술의 부산물 같아 보이기도 하고, 아닌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값어치가 안 나가는 돌멩이인 건 확실해 보였지만.
“귀한 시간 내줘서 고마워, 아가씨. 감사의 뜻으로 내가 좋은 거 하나 더 알려 줄게.”
“뭔데요~?”
블레이크가 눈을 찡긋했다.
“아가씨네 회사 사람들에게도 우리 쪽 사람들이 데이트 신청을 했을 거야.”
“우와, 젠더노소 안 가리고 헌팅해요~?”
“그럼 우리가 괜히 변태 집단들이겠냐? 취향 폭이 폭넓다 이 말씀.”
“진짜 엄청난 변태 집단이시네~ 뭐 크리스마스 기념 단체 미팅, 그런 거예요~?”
“단체 미팅이라니, 이 아가씨 재미있는 소리를 하네?”
유쾌하게 웃은 블레이크가 하람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즐거웠어, 달링! 맘 같아서는 아가씨 집이나, KS까지 데려다주고 싶은데 술을 마셔서 그러진 못하겠네?”
“에엑~~ 데이트 마지막 마무리가 허술하시네~ 진짜 허접은 허접 맞나 보네요?”
“말했잖아~ 난 허접도 아닌 개허접이라고. 이 허술한 마무리로 KS까지 에스코트했다면, 술 안 마셨어도 KS에 들어가는 순간 와! 전유술사다! 그리고 끝내주는 결계술사 나으리들에게 잡혀 모가지가 싹둑. 이 몸은 손도 못 쓰고 깨꼬닥. 아가씨에게 못 볼 꼴 보여줬을지도 몰라. 아가씨에게 그런 꼴 보이면 죽어서도 내 체면이 안 살지. 그러니까, 이해해 주라?”
그가 하람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다음에 단체 미팅에서 만나면, 그땐 우리 귀염둥이에게 완벽한 에스코트를 보여줄게, 스위티!”
“두 번은 없어요~ 오빤 내 취향 아니니까.”
그렇게 대꾸한 하람을 보며 블레이크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우와, 아가씨, 지금 날 비참하게 찬 거야, 응?”
“말했잖아요~ 형은 내 취향 아니라고.”
“켁, 진짜 완벽하게 차였잖아~ 나 이래 봬도 어디 가서 외모로는 어디 안 꿀리는데. 아가씨 눈이 높긴 엄청 높은가 봐? 아니면 보는 눈이 절망적으로 없든가, 허, 이 외모에 혹하지도 않았다고? 응? 아가씨. 어느 쪽이야? 아니, 외모가 아니라면 역시 나이 차 문제인가?”
“외모고 나이 차고 자시고, 누가 언니 같은 변태를 좋아해요~?”
“그래그래, 데이트는 아니더라도, 연락처는 줄게.”
그가 하람의 주머니에 종잇조각을 찔러 넣었다. 내용은 보지 않아도 짐작 가능했다. 대충 아까 말했던 블랙버리 교도소 근처 어쩌고, 일 것이 분명했다. ‘명함’을 찔러 넣은 블레이크가 다시 한번 더 강조했다.
“생각 있으면, 단체 미팅에 와 봐. 대충 크리스마스 언저리에 열리거든~? 24일까지, 블랙버리 교도소 근처 폐건물로 어서 오세요~”
선글라스 너머로 눈을 반짝이며 하람을 바라본 블레이크가 씩 웃었다.
“그런데 안 봐도… 난 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 거 같다.”
“…흐음~ 스토커 주제에 예언가 흉내라도 내시는 거예요~?”
“하하, 예언가는 아니지만, 우리 귀염둥이가 원한다면 맞춰봐? 내 생각에 우리 아가씨는….”
블레이크가 씩 웃으며 몸을 숙인 채, 하람의 귓가에 ‘정답’을 속삭였다. 하람은 눈 깜짝도 하지 않았지만. 블레이크는 다 안다는 듯한, 아주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말이 맞지, 달링?”
“흐음, 그냥 알려주면 재미없죠~? 스포 싫어한다면서요~??”
“우와우~ 아가씨, 지금 내 정곡을 찔렀어. 밀당의 고수네 아주. 근데 어차피 맞는 답일 텐데, 지금 정답 알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응? 허니?”
“24일까지 기다려 봐요. 그땐 싫어도 알게 될 테니까~”
“기대되는데? 그럼, 또 보자! 변태 집단에서.”
블레이크가 유쾌하게 웃으며 하람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인파 속으로 멀어져 갔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프로스페리티의 거리 위, 아까 블레이크와 만났던 그 쇼윈도 앞에 서 있었다. 이것도 전유술일까? 아니면 블레이크의 능력일까? 어느 쪽이든 지금은 알 수 없었다.
블레이크와 헤어져 프로스페리티의 거리에 혼자 남은 하람은 문득 요 일 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KS에 입사한 이후, 정확히는 A팀에 들어간 이후 그는 놀라울 정도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예전에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지후가 죽은 이후로는 다시는 되찾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삶이었다.
하람에겐 KS의 명분이나, 아키텍트의 명분이나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공? 세상의 멸망? 어쨌든 그들의 명분은 그들의 명분이지, 하람의 명분이 아니다.
하람은 언제나, 정확히는 지후가 죽은 그날 이후로, 먼 미래는커녕 내일 같은 것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람에게는 언제나 현재, 지금이 우선이었다. 먹고 살기도 바빴지만, 당장 제 앞가림하기도 바쁜 지금 불확실한 미래에 희망을 거는 것만큼 부질없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먼 미래를 그려봤자, 미래는 어쨌든 불확실한 것.
불확실한 걸 꿈꿀 필요가 있을까?
자신도, 지후도, 그리고 허슬턴의 사람들이 그러지 않았는가?
꿈은 당장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는 주린 배를 채우기는커녕, 집세도 낼 수 없었다. 생존에 필요 없는 감정은 최우선으로 잘라내야 했다. 꿈이니 미래니 하는 것들은 생존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내 것이라 생각했던 것도, 한 바람에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데.
최근에도 겪지 않았던가? 하람은 그 공화 속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그 일을 겪고 나서 불발률이 극도로 높아진, 제 장기였던 언령을 떠올렸다. 갈고 닦아 제 것으로 만들었던, 혹은 만들었다고 생각한 것마저도 숨 한 바람에 허무하게 불길이 꺼져버리는 것, 그게 인생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꿈꾸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런 건 처음부터 내가 누릴 수 없던, 과분한 것이었다고 하는 편이 낫다.
그러면 적어도, 상처를 덜 받을 테니까.
꿈꾼다는 것은 곧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한다는 것. 기대한다는 것은 곧 바라고, 갈망한다는 것. 기대하지 않으면, 바라고 갈망하지 않으면 잃었을 때의 상처도 없으니까.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오로지, 지금뿐이다.
하지만… 가끔은 분수 넘치는 꿈을 꾸게 된다. 평범한 일상을, 그것이 지속하는 가까운 미래를. 그리고 감히 바란다. 이 평범한 일상이 오래되기를. 예전 같으면 바라지도 못했을 그것을 내심 꿈꾸게 만든 것은 지금 제게 소중한 것들이었다.
내가 감히 미래를 꿈꿔도―아니, 아주 조금 더 앞을 기대하고, 바라봐도 될까?
하람에게 지금 소중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하람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하람은 몸을 돌려 캐피탈 쪽으로 향했다. KS로, 정확히는 A팀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앞날은 몰라도, 적어도 지금 해야 할 일은 확실했다. 지금은, A팀과 함께할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할 때였다.
- 이전글하람 | 사고뭉치들의 하루 (w. 예쉬 후퍼) 26.03.29
- 다음글하람 | 암운에 잠겨가는 하루 26.03.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