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 깨어져 나가는 ■■
굳게 닫혀 있었던 문이 열린 것은 감금 이틀째가 되는 날이었다. 빛을 등지고 선 채 문 앞에 나타난 낯선 이들의 음영을 보며 월터는 혼란스러워했다. 이곳은 인면괴수들이 살고 있는 도시 아니었나?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사람의 인영임이 분명했다. 월터를 일으켜 세우려는 듯 내미는 손 역시도 괴수가 아닌 사람의 것이었다. 월터는 손을 잡는 대신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지?"
"매사냥꾼."
"그 옷차림은, 당신들은 포브가 맞나?"
"맞아. 급진파 포브의 한 지류지. 하지만 우리 소개는 이쯤에서 그만두겠어."
"……."
"더 지루하고 중요한 이야기가 있거든."
"……."
"할 말이 많아.“
"……."
"안심해. 우린 에스퍼들을 해칠 생각이 없거든."
우리가 그렇게나 '그쪽 편'이 분명할 인면괴수를 공격했는데도? 월터는 눈 앞에 보이는 손바닥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월터가 손을 잡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들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월터의 손을 먼저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는 '더 지루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매사냥꾼', 그들의 목표는 현 치안국 중심으로 돌아가는, 중앙집권적 통제를 꾸준히 고수하고 있는 현 알키마드의 체제, 나아가 그런 알키마드의 완전한 붕괴였다. 소위 말하면 혁명을 꾀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왜 이 이야기를 적인 우리에게 하는 거지?"
"도움을 청하고 싶으니까."
"우리들이 필요하다는 건가?"
"맞아."
확실히 해칠 생각이 있었다면 진즉에 해쳤을 것이었다. 일단 그들과 인면괴수들이 무슨 관계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들은 인면괴수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인면괴수들을 공격했으니 당연히 이쪽도 목숨을 빼앗겼어야 옳았다.
"…당신들은 인면괴수들과는 무슨 관계지? 협력 관계로 보였는데."
"…이런, 시작부터 끔찍한 걸 묻네."
월터의 질문에 상대는 대답하며, 이맛살을 살짝 찡그렸다. 마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기억해 낸 모양새였다. 겨우겨우 봉해 두었으나 조금이라도 건들면 터질 상처를 건드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뭐 됐어. 어차피 우리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건 대의니까. 그리고 솔직히 그쪽도 시스템의 희생자니, 우리가 당신들을 탓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시스템이라니?”
“잘 들어. 지금부터 얘기하는 것들은 모두 ‘사실’이니까.”
한꺼번에 많은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와서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두앗'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그들이 말하는 정보들은, 자기가 지금까지 아무런 생각 없이 살던 세계의 근원을 부정하고 흔들어 놓는 무엇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렇구나' 내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라며 체제에 순응하고 방관자에 가까운 삶을 산 월터에게는 사실 크게 와닿지는 않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들은 전부…알키마드의 역사, 프론티어의 업적, 그리고 시민들과 그 기득권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이나 가깝고도 먼 세계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달까. 머릿속이 안개로 가득 찬 듯한 느낌이었다.
'머리를 세게 맞거나 바닥에 부딪히는 충격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지'
그들이 말해준 '사실'들이 실감 나지 않는다면, 직접 보고 겪을 수밖에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던가. 월터는 자기 눈으로 직접 '사실'을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더 이상 그들을 해치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여기에는 포브의 전설, '키라나 와히드' 역시도 깊게 관여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비록 월터가 자경단 일을 하는 것은 일이 없을 때나 시간이 빌 때뿐이었지만, 비정기적이라 해도 월터는 나름 꾸준히 자경단 임무에 참여하는 편이었다. 가끔은 '키라나 와히드'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월터가 포브 일을 자원할 무렵에 그는 이미 반정부 세력을 형성해 두앗에 터를 잡은 시점인 모양으로, '키라나 와히드'라는 사람은 이미 포브 내에서 누군가의 화두에 오를 때마다 사람들이 은근슬쩍 함구하거나, 어물쩍 넘기고는 하는 화제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 관한 화제를 꺼려하는 만큼 말을 말을 삼가는 편이었지만 열 번 중 여덟아홉 번은 그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심지어는 그에 대한 화제가 나올 때마다 '그 에잇핑거 바스터드 말이지.' 하며 열을 내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
문득 월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제임시나의 아버지. 월터의 기억에 의하면 분명 제임시나의 아버지도 '내쫓겼다'고 들었다. 언젠가 생전의 융 할멈이 술에 취해 궁시렁거리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에잇핑거 바스터드, 그 독한 년이 우리 제임스에게 괜한 바람을 불러일으켜서…’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지금 와서 확실해졌다. 아웃스커트의 터줏대감 융 할멈, 그리고 그 손녀인 제임시나의 성깔머리 때문에 다들 쉬쉬하고 있었지만, 뒤에서 알음알음 나도는 제임스에 관한 소문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사람들이 융 할멈과 제임시나의 뒤에서 제임스에 관해 뒷말을 할 때마다 ‘미친놈’이니 ‘반동분자’니 뭐니 하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고는 했다. 어쩌면 '제임스'도 두앗의 규칙을 어겨 목이 잘려나가지 않거나 죽지 않은 이상 두앗에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지금, 제임스나 제임시나나 서로를 만나고 싶어 할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애초에 멀쩡한 가족과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 삶을 버릴 사람이라면 오래 전 버린 가족보다는 본인의 삶과 신념이 우선일 터였다. 아무튼 이곳은 알키마드의 현 체제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우리는 그저 그들의 ‘필요’에 의해 과분한 호의를 받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말이 거짓 없는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괴수라고 생각했던 그들의 동료를 해친 것이 된다. 월터는 문득 폐허에서 에리니스와 함께 상대했던 ‘인면괴수’를 떠올렸다. 목숨이 오가는 공방 끝에, 그 인면괴수는 분명 두 사람의 협공 끝에 목숨이 끊어졌었다. 월터의 눈에, 그리고 에리니스의 눈에도 분명 그것은 인면괴수로 보였더랬다. 어쨌든 그것이 영자칩이 일으킨 오류가 보여준 환각이었고, 이쪽도 얻어맞았으니 정당방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눈에 ‘인면괴수’로 보였던 것이 사실은 사람의 말로 그들에게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전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인제 와서는 알 길이 없겠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가까운 동료, 혹은 주민을 죽이고 상처입힌 그들을 찢어 죽여도 시원찮아 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두앗의 주민들은 어찌 됐든 에스퍼들을 향한 사적인 감정보다는 대의를 앞세워, 그들이 할 수 있는 처사 중에서 가장 관대한 처사를 내려주었다. 어찌 보면 월터는 두앗의 사람들에게 목숨 빚을 진 것이나 다름없었고, 빚이나 신세를 지면 그만큼 갚아야 하는 월터의 신조 상 그들에게 최대한 협력해주어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아웃스커트의 월터 워커는 그곳에 쌓아둔 것이 많았다. 알키마드가 부조리가 가득한, ‘썩어빠진 도시’이며 자신 역시도 그 부조리를 받아오며 살아온 사람이라고 해도, 그곳은 월터 윌리엄 워커가 28년 평생을 살아온 고향이었다. 부모님을 포함해 부조리함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는 아웃스커트의 주민들이 있었고, 그들은 월터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평범한 일상’의 일부였다. 고향을 등지고 그들을 등진다는 것은 그가 항상 원하고 추구하던 평범한 일상에서 멀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월터 워커가 오퍼레이션 마아트에 지원한 이유, 그리고 오퍼레이션 마아트가 열린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인면 괴수 문제였다. 그리고 그 인면괴수의 정체가 영자칩의 오류에 의한 환각이라는 사실도 전부 사실이라면 이제는 그럴싸한 명분도, 변명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월터 워커는 분명 두앗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깨부쉈다. 이것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괴수’와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것은 그 어떠한 변명이나 타당한 이유를 갖다 붙인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한 살인이었다. 그런 사람이 뻔뻔스레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삶을 누리고 싶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무표정이었지만 눈빛이나 낯빛이 꽤 어두웠던 모양이다. 월터의 표정을 유의 깊게 지켜보던 매사냥꾼의 일원이 입을 열었다.
“충격적일 만도 하지.”
“…….”
매사냥꾼의 일원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월터의 침묵을 달리 이해한 것 같았다. 월터가 침묵하는 이유가 아직 자신들의 말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인지, 그는 조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디 보자, 당신은 다른 에스퍼들보다 상태가 좀 나아 보이니까. 도시를 한 번 둘러보도록 해.”
“…….”
“당연하지만, 모든 구역은 아니야.”
월터는 살짝 당황했다. 일부라지만 도시를 둘러보게 해준다는 것, 이건 그들에게도 상당한 리스크가 될 일 아닌가?
“어째서.”
“그쪽이 우리 말을 못 믿는 거 같아서.”
가볍게 말한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는 월터를 향해 말했다.
“…백번 입 아프게 말해봤자 소용없을 테니, 직접 당신 눈으로 봐봐.”
우리의 삶, 그리고 세계의 진실을. 그가 말했다. 그래서 월터 워커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직접 확인하는 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었다. 어쨌든 그 모든 것을 보고, 이후의 판단은 자기 자신이 내려야만 했다. 아직은 확신이 없었고, 솔직히 앞으로도 확신이 생길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두앗을 살펴보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직접 본다면, 적어도 와닿는 것이 조금쯤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까운 미래의 선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그러고 나서, 자기 자신에 대한 처우를 생각하자. 적어도 지금 눈앞에 먼저 닥친 일들이 모두 끝나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월터 워커는 더이상 일전의 '평범한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일상, 그의 세계는 오퍼레이션 마아트에 지원한 순간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고 이제는 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깨어져 나간 것은 용을 쓰려고 해 봐도 결코 완벽하게 복원될 수 없을 것이다.
- 이전글월터 | 진정 효과 (w.카란) 26.08.06
- 다음글월터 | 좋은 곳 (w. 다니엘) 26.08.0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